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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O 리포트] 독점지대와 디지털보험사의 미래

Numbers 2023. 10. 30. 12:02

허정수 전 KB금융지주 CFO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가장 좋아하는 투자대상 기업이 경제적 ‘해자’(垓子, moats)를 가진 기업라고 했다. 이들 기업이 ‘독점지대(Monopoly Rent)’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경제적 해자는 새로운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어렵게 한다. 다수 시장 참여자들의 경제활동으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를 경제적 해자를 가진 일부 그룹이 독식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해자가 생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각종 허가, 면허, 특허 등의 규제가 대표적이다. 압도인 자본력과 기술력 차이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플랫폼 비지니스에서 창출되는 정보의 독점과 비대칭, 네트워크 효과도 경제적 해자를 자연스럽게 구축한다. 공동체 구성원 다수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를 경제적 해자 소유자들에게 어느 정도 수준에서 허용할 것인지는 항상 사회적 논란을 낳는다.

최근 의과대학 학생수 증원 이슈로 다시 소란이 일고 있다. 우리사회가 의사의 경제적 독점지대를 어느 수준에서 용인할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이다. 경제적 독점지대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건강한 시장경제 시스템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적정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순기능보다 역기능으로 다수의 경제주체들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커진다.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우리나라 디지털보험사들은 규제로 만들어진 경제적 해자의 높이를 매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보험업법에 디지털보험사(인터넷보험사)라는 말은 없다. 규제 당국이 비대면 보험사 비지니스를 ‘상품제조’ 보다 ‘판매채널’에 방점을 두고 접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험업법 시행령(제13조)에서 ‘통신판매 전문보험회사’로 면허를 받아 사업하는 보험사를 시장에서는 디지털보험사로 지칭하고 있다. 통신판매 전문보험회사(이하, ‘디지털보험사’)는 전체 보험계약 건수와 수입보험료의 90% 이상을 전화, 우편, 컴퓨터통신 등의 ‘통신수단’을 이용하여 판매해야 하며, 이를 지키지 못하면 요건 충족시까지 통신수단 외의 판매가 금지된다. 디지털보험사는 상품제조자(Originator) 겸 판매자(Distributor)이다. 지급여력 규제 등 상품제조에 수반하는 리스크를 직접 부담해야 한다. 즉, 자체적으로 위험을 평가하고 상품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국내 최초 디지털보험사는 2013년 9월 교보생명이 일본 라이프넷과 합작하여 출범한 생명보험 계열의 ‘교보라이프플래닛’이다. 이후 손해보험 계열인 캐롯 손해보험(2019년), 카카오페이 손해보험(2022년)이 추가로 승인을 받았다. 하나손해보험(2020년)과 신한EZ손해보험(2022년)은 기존 손해보험사 인수로 출발하여 처지가 좀 다르지만 디지털보험사로 분류된다. 국내 인터넷은행들이 사업시작 초기부터 단기간에 돌풍을 일으키며 유의미한 실적을 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국내 디지털 보험사는 아직 전혀 존재감이 없다. 사업을 갓 시작한 보험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창업 10년차를 맞이한 교보라이프플래닛 역시 창사 이래 한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다. 2023년 상반기에도 약 91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보이고 있다. 지금의 비지니스 환경과 회사 내부역량이 디지털보험사의 지속가능 성장을 만들어낼 형편이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인터넷뱅크들은 뱅킹 비지니스의 본질인 예대업무에 철저히 집중하면서 디지털 프로세스와 고객관리 개선을 추진하고 차별화에 성공했다. 반면, 디지털보험사들은 보험업 핵심인 장기보장성 인보험(人保險) 뿐만 아니라 소액 단기 일반보험과 자동차보험에서도 경쟁우위 확보를 못하고 있다. 비슷한 동기와 목적으로 디지털 비지니스를 추진한 두 업종의 결과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많다. 우선, 비지니스 본질이 아주 다르다. 보험은 내줄 돈(보험금) 관리를 잘해야 성공하고, 뱅킹은 받을 돈(대출금) 떼이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당연히 비지니스 밸류체인(Value Chain)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의 생각과 행동에 차이가 있다. 보험은 비자발적 거래동기가 강하기 때문에 니즈(Needs) 환기와 설득과정이 매우 중요한 반면, 뱅킹은 자발적 거래가 기본이다. 거래 시작단계부터 보험이 훨씬 더 품이 많이 드는 것이다. 특히, 복잡하고 어려운 장기보장성보험 판매는 비대면 디지털 수단만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다. 보험업이 지닌 원초적 숙명인 셈이다.

당국 규제와 Legacy 보험사 관행도 디지털보험사 성장에 큰 걸림돌이다. 디지털보험사 핵심 비지니스모델의 하나인 헬스케어 서비스 역시 비대면 원격진료와 복약처방, 의료정보 Data 표준화와 활용 등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다. 디지털 보험사는 자체 제조한 상품만 판매할 수 있다. 대신, 플랫폼 사업자는 다른 여러 보험사 상품을 팔 수는 있다. 일종의 디지털 GA이다. 하지만, Legacy 보험사들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상품이 디지털환경에 적합하지 않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디지털보험사 라이센스를 가지려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또한, 규제상 고객을 적어도 1회 이상 대면해야 한다. 다만, 화상채팅, 녹취 등으로 대신할 수 있지만 ‘대면상담’을 통한 계약 보다 ‘디지털기록’으로 영원히 남겨야 하는 판매자들의 부담이 훨씬 더 크다. 결국, 현실에서는 고객을 직접 만나 계약서를 ‘종이서류’와 ‘전자서류’ 중 선택하는 정도에서 타협한다. 현재 모든 보험사의 상품 설계서(사업방법서, 보험약관 등)가 텍스트 문서로 입력하게 되어 있다. 대면채널 비니지스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레거시 보험사들 처지가 다분히 배어 있는 장벽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서들이 숫자와 Data로 변환되어야 보험업의 디지털 프로세스 개선과 유통 혁신이 가능해진다. 현재 텍스트 문서를 변환하는 다양한 기술과 소프트웨어들이 출시되고 있어서 시간이 가면 어느 정도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디지털보험판매 스타트업 ‘해빗팩토리’ 대표는 음반산업의 디지털화 과정을 빗대어 지금의 디지털보험업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음반산업에서 CD, 카세트테이프 등에 음원을 담아 만든 제품을 중간 판매업자에게 넘기면 전국 총판이 유통망을 통해 고객에게 전달했다. 중간 유통채널 없이는 고객이 직접 음원을 구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플랫폼 기반의 디지털음반 시장으로 바뀌면서 음원 생산자로부터 유투브 등 플랫폼을 통해 언제든지 세계 어디서나 고객이 직접 구매하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디지털 보험사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중간 유통비용을 줄이고 창출된 부가가치를 고객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고객과 향유하는 부가가치의 크기가 디지털보험사의 성공기준이 되어야 한다. 순보험료는 위험률에 연동되기 때문에 크게 바뀌지 않는다. 결국, 전체 보험료의 20~30%에 달하는 부가보험료 효율화와 고객 몫의 적정배분이 디지털보험사 전략이 된다. 현재, 우리나라 디지털 보험사 사업모델이 상품제조사 역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향후 상품제조 뿐만 아니라 헬스케어 서비스, 시스템 구축 및 솔루션 제공 등 비지니스 영역이 확대되면 다양한 수익모델이 나타날 것이다.

2023년 10월 6일 ‘실손보험의료비 자동청구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의 ‘실손보험 청구과정 간소화 필요성’ 권고로 시작되어 수많은 논란 끝에 무려 14년 만이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첨예하다는 방증이다. 특히, 그동안 ‘면허증(License)’이 만들어낸 ‘독점지대’를 향유해온 사람들의 반대가 당연히 가장 격렬했다. 앞으로 시행령에 담길 구체적인 내용에 따라 ‘개인 의료정보의 비대칭성’이 완화되면서 의료계 뿐만 아니라 보험산업, 개인들의 보험 및 의료소비 활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선 의료계 입장에서는 그동안 노출되지 않았던 비급여항목에 대한 진료와 처방, 치료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실손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제출을 의료기관이 대신해주니 고객들은 당장은 아주 편하다. 하지만, 반대해온 측의 주장대로 공유된 의료정보가 보험사에 축적될 경우 보험가입과 보험금지급 거절, 보험료 인상 등에 악용될 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미지급보험금 낙전수입을 당장 포기해야 한다. 당연히 실손보험 계약이 많은 대형 손해보험사들 수익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공개되는 의료정보의 내용과 활용범위에 따라 보험업 비지니스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 만일, 제공되는 의료정보가 질적으로 우수하고, 보관기간도 충분하며, 이용에 제약이 크게 없다면 보험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다. 실손보험 가입자를 많이 보유한 보험사가 이제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을 하게 된다. 새로운 형태의 ‘정보비대칭성’, 소위 ‘경제적 해자’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독점지대’을 대부분 가져가게 될 것이다. 각 개인의 전생애에 걸친 건강이력 정보를 바탕으로 개인별 여생에 맞는 최적화된 보험상품을 개발하고 맞춤형 건강관리 솔루션을 제안할 수도 있다. 풍부한 Data와 정보는 아주 강력한 경쟁력 확보수단이 된다.

반면, 실손보험 계약이 적은 보험사는 관련 상품개발도 어렵고 보험심사(UW) 등 프로세스 관리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여 결국은 건강보험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디지털보험사는 실손보험 기반의 비지니스영역에서 설 자리가 없다. 가입자 4,000만명에 육박하는 제2의 국민건강보험이라고 불리는 실손보험 영역에서 Data 획득과 비지니스 기회를 얻지 못하면 보험업에서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Oscar 헬스케어, 핑안 굿닥터, Lemonade 등 해외 디지털보험사들의 성공사례는 모두 ‘질 좋은 고객DB를, 수익성 확보가 가능한 규모(Scale)로, 얼마나 빨리 축적’하는 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정법안에는 전산 시스템 구축과 운영 업무 관련자가 업무수행 중에 얻은 자료를 업무 외 용도로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을 물도록 되어 있다. 보험금 지급청구로 한정하여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 보호에 전적으로 초점이 맞춰진 조치이다. 개인 의료정보 통제권 이슈는 의료기관과 보험사 사이에 정보를 받아 관리하는 중개기관을 두기로 원칙을 정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정해지든 고객 동의를 얻어 비지니스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사람들의 일상활동을 통해 창출된 개개인의 의료정보 가치가 ‘독점지대(Monopoly Rent)’ 형태로 ‘면허(License)’나 ‘정보(Data)’를 가진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후속되는 관련법령에 담길 의료정보 공유대상과 수준, Data 보관기간, 정보활용의 범위 등 구체적인 규제내용에 따라 초기단계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디지털보험사들의 미래가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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