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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현대차 정의선 회장의 ‘근기’

Numbers_ 2024. 8. 1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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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현대차 정의선 회장의 ‘근기’

‘근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기량 됨됨이 등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한자로 근기(根器)라고 씁니다. 불교 용어로서 근기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교화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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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기량 됨됨이 등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한자로 근기(根器)라고 씁니다. 불교 용어로서 근기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교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때는 근기(根機)로 표현합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도를 깨치고 대중을 가르치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고 타고난 자질이나 능력 또는 애초에 큰일을 수행할 그릇이 돼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기업 CEO가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애초에 근기가 없으면, 그릇이 안 되면, 국가도 기업도 하다못해 아주 작은 단체도 불행해지고 결국에는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근기 있는 리더인지, 제대로 된 지도자인지 파악하는 게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 같은 뛰어난 리더도 마속을 잘못 판단해 일을 그르치고는 자신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유비만 못하다고 크게 한탄합니다.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는 게 어려운 것은 말과 행동은 매끄럽고 그럴싸한 데 도량과 됨됨이는 형편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라도 기업도 하다못해 작은 조직도 근기가 있는 제대로 된 리더를 만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게다가 근기 있는 리더라 하더라도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고전 ‘논어’의 마지막 장인 요왈(堯曰)에서는 3가지를 제시합니다. ‘윤집기중’(允執其中) ‘짐궁유죄’(朕躬有罪) ‘지명’(知命)입니다. 

중국 상고시대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천하를 물러주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늘의 뜻이 그대에게 있어 자리를 물려주는데 ‘공평한 원칙인 중도를 굳게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매우 어려워지고 그대에게 준 봉록과 벼슬마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 ‘윤집기중’(允執其中)은 여기 나오는 “공평한 원칙인 중도를 굳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특정 이념에도, 특정 학연이나 지연에도, 금전욕이나 명예욕 등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리더의 두 번째 조건인 ‘짐궁유죄’(朕躬有罪)는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제 책임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뜻입니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 하늘에 제사 지내며 기도한 내용입니다.

경영학자 짐 콜린스가 위대한 리더는 회사가 잘 돌아갈 때는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고 반대로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주변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모두 다 자기 책임이라고 말한다고 했는데 ‘짐궁유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명’(知命)은 시대의 큰 흐름을 읽고 아는 것입니다. 공자는 ‘논어’를 마무리하면서 시대의 큰 흐름인 ‘명’(命)을 알지 못하면 선견지명이 없으니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우고 때로 익히니)로 시작한 논어는 ‘부지명 무이위군자야’(不知命 無以爲君子也)로 끝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분야를 막론하고 ‘윤집기중’ ‘짐궁유죄’ ‘지명’의 조건을 두루 갖춘 큰 지도자가 있을까요. 

우선 현존의 정치 지도자 중에는 없는 듯합니다. 하나같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문화 종교 분야에서는 예전에는 큰 어른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 분야의 기업인들 가운데 근기 있는 리더를 꼽으라면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입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대단한 예지력으로 반도체와 모바일을 발굴했고, 인재를 찾아 쓰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서도 편향되지 않았을뿐더러 일이 잘못돼도 남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현직 기업인 중에서는 수많은 오너 경영자와 전문 경영인이 있지만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회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 회장 스스로는 몹시 부담스럽겠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통찰력에다 늘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하다못해 절제하는 사생활까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정의선 회장은 1994년 현대모비스에서 기업인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해 2005년 기아차 대표이사를 맡습니다. 지금은 기아 시가총액이 현대차와 엎치락뒤치락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당시만 해도 기아는 품질 문제로 수익성이 악화돼 누적 적자만 수천억원에 달했습니다. 

대개 오너 2~3세들이 경영을 맡으면 계열사 가운데 가장 잘 나가는 회사를 골라 취임해 리스크를 줄이는 게 관례입니다. 이에 비해 정의선 회장은 “기아차에 나를 걸겠다”며 도전해 기아를 세계적인 회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정의선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은 전기차 부문과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의 성공에서 입증됩니다. 신생기업 테슬라가 전기차 시장에서 질주하는 것을 지켜본 정 회장은 회사 경영진을 설득해 전기차에 승부를 겁니다. 내연기관차 중심의 연구개발 조직을 전동화 중심 체제로 전환했고, 마침내 2019년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가 탄생합니다.

현대차그룹은 전통적으로 가성비 위주의 중저가 차량에서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세계 1등이 될 수 없습니다. 프리미엄 브랜드에 대한 도전이 필요했습니다. 정의선 회장은 2015년 급성장하는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제네시스 브랜드를 론칭했고 10년이 지나 올 상반기에만 10만대 넘게 팔았습니다.

이런 성과들에 힘입어 정의선 회장은 2020년 10월 현대차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래 4년 만에 매출 200조원, 영업이익 30조원 시대를 열었고 토요타 폭스바겐그룹에 이어 세계 3위의 완성차회사 반열에 올랐습니다. 올 상반기 실적도 현대차그룹은 매출과 자동차 판매량 영업이익 모두 글로벌 3위를 기록했고 영업이익률은 10.7%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현대차그룹은 1985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대한민국 양궁을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정의선 회장도 정몽구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2005년부터 20년 넘게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습니다.

현대차그룹과 정 회장의 지원에 힘입어 우리나라 양궁은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5개 전 종목을 석권했습니다. 한국이 양궁을 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우진 선수는 “공정한 대한양궁협회가 있기에 모든 선수가 부정 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의선 회장은 양궁협회 운영에서도 공정하고 치우치지 않는 ‘윤집기중’의 원칙을 지킵니다.

이번 파리올림픽 여자 양궁 개인전에서 전훈영 선수는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쳤습니다. 이에 정의선 회장은 그를 찾아가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이번만이 아니고 정 회장은 경기 때마다 패한 선수나 탈락한 선수를 찾아가 위로합니다. 

정의선 회장은 대한민국 양궁이 전 종목을 석권해 5개의 금메달을 딴 소감을 묻자 “선수들이 워낙 잘해서 제가 거기에 묻어가고 있다. 저는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영광은 주변 사람들한테 모두 돌리고 자신은 끝까지 뒤에 남는 ‘짐궁유죄’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옛 성현들은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크게 성공해 천하를 얻으려면 천시(天時, 운명) 지리(地利, 환경) 인화(人和, 인재) 3가지가 필요하고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화라고 했습니다. 현대차그룹과 정의선 회장이 인화뿐만 아니라 천시와 지리까지 얻어 큰 뜻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