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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잃어버린 10년, 삼성과 이재용의 ‘실패’

Numbers 2025. 2. 1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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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잃어버린 10년, 삼성과 이재용의 ‘실패’

‘사법 리스크’속 ‘초일류’에서 ‘평범한 기업’으로외적요인 아닌 기술력 추락등 ‘경영실패’가 원인큰변화 없을듯…“당장 생존이 우선” 판단할 수도#2016년 11월 ‘국정농단 사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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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리스크’속 ‘초일류’에서 ‘평범한 기업’으로
외적요인 아닌 기술력 추락등 ‘경영실패’가 원인
큰변화 없을듯…“당장 생존이 우선” 판단할 수도

#2016년 11월 ‘국정농단 사건’에서 시작해 2025년 2월 ‘불법 승계’와 ‘부당 합병’ 항소심 무죄 선고까지 햇수로 10년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괴롭혔던 ‘사법 리스크’가 사실상 끝났습니다. 서울고법 형사 13부는 지난 3일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 분식 회계 의혹 등 항소심에서 이재용 회장을 비롯 전·현직 삼성 임원들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은 관행과 예상대로 지난 7일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1·2심 모두 무죄를 받은 데다 상고심이 법률심인 점을 감안하면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면서 총수로서 경영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연계된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정치 논리에 따른 여론 재판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길고 긴 검찰·사법부와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이재용 회장 개인뿐 아니라 삼성그룹도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었습니다. 결과가 이토록 치명적일 줄은 누구도 몰랐습니다.

이재용 회장은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 2017년 2월 구속된 이래 석방과 구속을 반복하면서 총 560일, 1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 검찰은 다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불법 승계라며 칼을 들이댔습니다. ‘부당 합병’과 ‘분식 회계’ 재판은 2021년 4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진행됐습니다. 이 회장은 1·2심을 합쳐 100차례 이상 재판에 출석했습니다.

10년에 걸친 검찰 수사와 재판은 이 회장뿐만 아니라 삼성 수뇌부 모두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았습니다. 그룹 전체의 리더십 공백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은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투자와 M&A(인수·합병) 등 경영 판단의 주요 고비마다 실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룹 총수가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면서 ‘보신주의’가 조직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새로운 비즈니스에 도전하기보다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자’는 문화가 팽배했습니다. 제대로 된 인재라면 이런 문화는 견디기 힘듭니다. 어렵게 영입한 인재들이 삼성을 떠났습니다.

큰 시련과 위기에 직면했을 때 위기를 기회로 삼아 딛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이재용 회장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2년여의 감옥살이를 누구보다 힘들게 했고, 4년 넘는 ‘불법 승계’ 재판에서도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10년에 걸친 검찰 수사와 재판, 감옥살이는 이재용 회장의 타고난 성정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인 듯합니다. 하이에나 같은 정치권력과 검찰이 이런 사정을 알고 봐줄 리도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건희 회장의 유고 사태가 너무 빨리 온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재용 회장 등 삼성 수뇌부가 10년에 걸친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면서 삼성전자는 ‘초일류 기업’에서 ‘평범한 기업’으로 주저앉습니다.

삼성은 기존 메모리 시장의 절대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5대 미래 사업으로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를 선정해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확대됩니다. 지난해 말 기준 삼성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0%도 채 안 됩니다. 삼성은 이제 파운드리 사업은 정리하고 메모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전문가들도 많습니다.

더 아픈 대목은 삼성전자가 절대 우위였던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도 후발인 SK하이닉스에 추월당했고 그게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도체 스마트폰 가전 등 종합 전자회사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회사 전체적으로 32조7000억원, 반도체 부문에서는 15조1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이에 비해 SK하이닉스는 반도체에서만 지난해 23조4000억원을 시현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올해 예상치입니다.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올해 삼성전자 전체의 영업이익을 27조~30조원 수준으로 전망합니다. 반도체 부문만 보면 삼성전자는 올해 최대 12조~13조원, 최악의 경우 7조~8조원대까지 떨어질 전망입니다.

이에 비해 SK하이닉스는 올해 30조~33조원의 영업이익이 예상됩니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만 하는 SK하이닉스가 메모리는 물론 파운드리 모바일 가전 등 종합 전자회사인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을 앞지를 전망입니다.

원인은 기술력입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SK하이닉스에 1~2년 뒤졌다는 게 정설입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더 이상 범용 메모리가 아닌 고부가가치의 HBM(고대역폭메모리)에서 승부가 납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최고경영자)는 지난달 CES 미디어 간담회에서 삼성전자의 8단 5세대 HBM 반도체 HBM3E 품질 검증 얘기를 하다가 “삼성전자의 HBM은 새로운 설계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HBM은 삼성전자의 아킬레스건입니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9년 AI시대 반도체산업의 총아인 HBM 팀을 해체했다가 크게 실수한 것을 알고는 뒤늦게 나섰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지난 2023년부터 끊임없이 엔비디아의 문을 두드리지만 여전히 테스트만 진행 중입니다. 이런 와중에 젠슨 황이 폭탄 발언을 한 것입니다. 젠슨 황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의 HBM 기술력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내·외신 보도가 최근 들어 자주 눈에 띕니다.

삼성전자와 달리 SK하이닉스는 최태원 SK회장이 지난달 CES 간담회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는 질문에 “과거에는 엔비디아보다 개발 속도가 뒤처져 상대편이 더 빨리 개발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제는 역전됐다”며 자신감을 피력했습니다. 이런 기술력에 힘입어 SK하이닉스는 HBM 매출이 올해 지난해 대비 10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불법 승계와 부당 합병, 회계 부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삼성전자 주가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반도체 관세 부과나 보조금 백지화, 중국 AI기업 딥시크가 세계 반도체 시장에 미칠 영향 등에 삼성전자 주가가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는 삼성이나 이재용 회장 입장에서는 검찰 수사와 재판, 구속수감 등의 ‘사법 리스크’가 개인적으로 아주 힘들고 그룹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만 시장은 이 회장이 처한 상황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너 회장이 재판받든 구속되든 시장과 투자자들은 오로지 삼성전자 경영 상황만 보고 판단하겠다는 냉엄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삼성은 자주 오너의 사법 리스크로 대형 M&A와 첨단기술 투자 등을 제대로 못 한다고 하소연하지만 시장과 투자가의 눈은 냉혹합니다. 특히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 해서 조금도 봐주지 않습니다.

이재용 회장이나 삼성 사업지원TF 입장에서는 오랜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경기 상승에 따른 일시적 실적 호조에 취하고 자만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선대 회장이 일군 초일류 1등 기업은 당연한 게 아니고 죽을 힘을 다해 쟁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대형 M&A도 추진하고 HBM 등 기술 투자도 과감하게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삼성의 잃어버린 10년을 초래한 근본 원인입니다. 삼성전자가 초일류 기업에서 추락한 근본 원인은 오너의 사법 리스크가 아닙니다. 이재용 회장과 사업지원TF의 변화에 대한 안일한 대응과 경영실패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는 SK그룹의 사례에서 입증됩니다. 사법 리스크에 시달린 것으로 치자면 삼성과 이재용 회장보다 SK와 최태원 회장이 훨씬 더 길고 심각합니다. 최태원 회장은 2003년 부당 내부거래와 분식 회계 혐의로 7개월, 2013년에는 횡령 혐의로 구속돼 2년 7개월 등 총 3년 2개월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재용 회장의 1년 7개월에 비해 2배의 세월입니다. 여기에다 2017년 이후 9년째 이혼 소송에 시달립니다. 개인적으로는 민망하기 그지없고 그룹 차원에서는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엄청난 소송입니다.

그럼에도 SK와 최태원 회장은 2012년 하이닉스 인수라는 빅딜을 단행했고, 만성적 부실·적자 기업 하이닉스를 세계 1등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SK와 최태원 회장이 삼성처럼 오너의 사법 리스크 탓만 하면서 수세적으로 경영했다면 SK그룹은 지금 생존의 갈림길에 섰을 것입니다.

삼성과 이재용 회장이 불법 승계와 부당 합병 항소심 무죄 판결을 계기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공격적으로 나설지는 모르겠습니다. 시장과 여론은 한결같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대형 M&A, 글로벌 빅테크와의 대형 프로젝트나 신사업 발굴 등에도 적극 나서주길 주문합니다. 옛 미래전략실의 단순한 부활이 아닌 급격한 기술 변화 흐름에도 대응할 수 있는 그룹 컨트롤타워의 부활도 강조합니다. 여기에 맞는 수뇌부 인사와 세대교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첨단기술 기업에 맞는 기업문화의 혁신, 소통도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해답은 이미 오래전에 나와 있지만 실행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그동안 이재용 회장이나 정현호 부회장의 사업지원TF가 해왔던 행동에 비춰보면 이번에도 대법원 상고심을 이유로 최종 사법 리스크가 마무리될 때까지 2년이고 3년이고 다시 수세적으로 경영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봐도 장기간의 실적 부진에다 비관적인 미래 전망으로 대형 M&A를 도모할 자금력도 없을뿐더러 베팅도 쉽지 않습니다. 그룹 수뇌부 교체도 대안이 없어 현 체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지금은 혁신을 도모하기보다 생존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도 조직도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습니다. 앞으로 다시 10년 뒤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은 어디쯤 서 있을까요?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