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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이재용 ‘독한 삼성’이 ‘프랑크푸르트 선언’ 되려면

Numbers_ 2025. 3. 2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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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이재용 ‘독한 삼성’이 ‘프랑크푸르트 선언’ 되려면

‘사즉생’ 메시지 위기상황 제대로 인식해 ‘안도’이 회장 본인부터 독해져야 현 위기 돌파 가능선대회장 ‘신경영’ 선언후 현명관 발탁 참고할만삼성 부활의 마지막 시간…연말까지는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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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즉생’ 메시지 위기상황 제대로 인식해 ‘안도’
이 회장 본인부터 독해져야 현 위기 돌파 가능
선대회장 ‘신경영’ 선언후 현명관 발탁 참고할만
삼성 부활의 마지막 시간…연말까지는 결판날 듯

이건희 선대 회장과 달리 이재용 삼성 회장은 메시지를 자주 내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이건희 회장을 회고하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 등 여러 어록이 떠오르지만, 이재용 회장 하면 딱히 생각나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굳이 꼽자면 ‘세상에 없는 기술’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 이재용 회장이 이번에 매우 강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해외 근무자를 포함해 삼성그룹 전 계열사 부사장급 이하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진행 중인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교육’ 자리에서입니다.

이재용 회장은 먼저 위기 돌파를 위해 경영진의 철저한 반성과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를 주문했습니다.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 문제에 직면했다. 1999년 다우지수를 구성했던 30개 대표 기업 중 24곳이 이미 사라졌다. 이대로 가면 우리도 잊혀질 것이다. 경영진부터 철저하게 반성하고 사즉생의 각오로 행동해야 한다. 성과는 확실히 보상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신상필벌이 우리의 오랜 원칙이며, 필요하면 인사도 수시로 해야 한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사업부별 문제점도 지적했습니다. “메모리 사업부는 자만에 빠져 인공지능(AI) 시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파운드리는 기술력 부족으로 가동률이 저조하다. 디바이스경험(스마트폰·TV·가전 등) 부문은 제품 품질이 걸맞지 않다. 삼성은 모든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이 훼손됐다. 위기 때마다 작동하던 삼성 고유의 회복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재용 회장은 경영진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적어도 1년에 절반 이상은 고객과 시장을 찾아가라. 경영진보다 더 훌륭한 특급 인재를 국적과 성별 불문하고 양성하고 모셔와야 한다.” 교육을 마친 임원들에게는 각자의 이름과 함께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라고 새긴 크리스털 패를 전달했습니다. 교육 핵심을 ‘독한 삼성’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동안 재계는 물론 삼성 내부에서도 이재용 회장의 상황 인식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위기인 것은 분명한데, 과연 오너가 제대로 상황을 인지하고 있느냐는 걱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사업지원TF와 재무·법무 라인 등 소위 ‘인의 장막’에 가로막혀 언로가 차단되고, 제대로 보고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2000여 임원을 상대로 한 이번 교육에서 드러난 이재용 회장의 전례 없는 강한 메시지는, 무엇보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오너가 현재 삼성전자와 그룹의 위기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비록 어렵더라도 해법을 찾을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재용 회장의 진단대로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빠르게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제너럴 일렉트릭(GE)·인텔·시스코·노키아·소니처럼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날 위험이 큽니다.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의 위기는 2014년 5월 이건희 선대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이재용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본격화했습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연계된 ‘국정농단 사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불법 승계’ 의혹에 이재용 회장이 연루되면서 삼성의 위기는 더욱 심화됐습니다.

삼성과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며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허송세월하는 동안 SK하이닉스·TSMC 등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2~3년 전부터는 삼성 내부에서도 위기론이 제기됐지만, 그때마다 “오너의 사법 리스크 해소가 먼저”라는 말 한마디에 묻혀버리곤 했습니다. 

이재용 회장이 인정하고 지적했듯이, 삼성전자는 메모리·파운드리·핸드폰·가전 등 모든 부문에서 기술력이 뒤처지고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입니다. 특히 핵심인 메모리와 파운드리가 심각합니다.

메모리 부문은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전영현 부회장이 정기 주총에서 “6세대 HBM4에서는 지난해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5세대인 HBM3E(12단)는 늦어도 하반기부터 엔비디아에 공급하겠다”고 밝혔으나, 낙관은 금물입니다. 이미 5세대 HBM3E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최근 세계 최초로 6세대 HBM4 샘플을 공개했습니다.

파운드리 부문은 더 암담합니다. 이재용 회장은 2019년에 “2030년까지 171조 원을 투자해 세계 1위로 올라서겠다”고 공언했지만,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2019년 1분기 19.1%에서 지난해 4분기 8.2%까지 떨어졌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파운드리 분야에서 철수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재용 회장은 2000여 삼성그룹 임원에게 결과에 책임지는 신상필벌을 강조하며, 필요하면 수시 인사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적·성별을 불문한 인재 양성과 유치도 역설했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며, 삼성이 처한 위기를 정확히 진단한 것입니다.

창업 이래 ‘인재 제일’을 늘 강조해온 삼성에서 인재가 떠나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삼성은 늘 기술을 강조하지만, 정작 기술 외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게 지금 삼성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인재들은 좌절하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삼성전자와 AI 인프라 투자 프로젝트 ‘스타게이트’ 관련 협의를 위해 방한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삼성전자에 근무하는 줄 알고 찾았던 S급 인재가 이미 삼성을 떠났고, 이재용 회장 등 삼성 수뇌부는 그가 떠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일화가 요즘 재계에서 자주 회자됩니다.

이재용 회장은 2014년 5월 선대 회장 유고 이후 경영 전면에 나선 지 11년 만에, 2020년 10월 그룹 회장에 취임한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2000여 임원 앞에서 삼성그룹과 삼성전자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건희 선대 회장이 취임 6년 만인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직원을 소집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한 것에 비견될 만합니다.

그러나 이재용 회장의 ‘독한 삼성’ 메시지가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되려면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형식입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세계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 명과 약 350시간을 토의했습니다.

반면 이재용 회장의 ‘독한 삼성’ 선언은 이 회장이 직접 등장하지 않고, 성우의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전해졌습니다. 성우의 목소리를 빌리든 직접 나서든, 내용 자체는 같겠지만 임원들이 느낄 간절함과 공감도는 크게 다릅니다.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교육’이라면, 이 회장이 교육 기간 내내, 이게 어렵다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당부했다면 ‘삼성다움’은 훨씬 더 빨리 복원됐을 것입니다.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후 그해 11월 현명관 삼성건설 대표를 그룹 비서실장으로 발탁해 3년간 신경영 실무를 진두지휘하게 했습니다. 당시 그룹 비서실장은 지금의 사업지원TF 부회장 자리에 해당하는, 그룹 내 2인자였습니다. 현명관 비서실장은 관료 출신으로 삼성 공채가 아니었고, 호텔신라 부사장·삼성시계 대표 등 비교적 외곽 계열사를 거쳤을 뿐입니다. 당시 삼성 내부에서는 그가 이인희(이건희 회장의 누나) 고문 사람으로 분류됐지만, 이건희 회장은 탁월한 안목으로 연고가 별로 없는 그를 중용했고, 결국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비록 현재는 재기 불능 수준까지 추락했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2014년 전후로 TSMC 출신 양몽송 부사장이 활약하던 때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 인텔이 57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 출신인 아시아계 리브 탄을 최고경영자로 발탁한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재용 회장이 진정으로 혁신을 통한 위기 돌파를 원한다면, 이건희 선대 회장의 현명관 발탁이나 양몽송·리브 탄 사례를 참고할 만합니다. 개혁을 위해서는 때로 순혈주의를 깨야 합니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이 위기 탈출과 성과에 대한 중압감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때로 과음까지 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렇겠습니까. 그 마음고생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재용 회장은 스스로 말했듯 사즉생의 각오로 행동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은 말이 아닌, 행동과 실행의 시간입니다.

이재용 회장과 삼성전자에 주어진 시간은 짧게는 올해 연말까지, 길게는 내년까지입니다. 1~2년 내에 턴어라운드하지 못하면 다시 기회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반도체 경기가 바닥을 치고 내년 말까지는 반등이 예상된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삼성전자 주가가 최근 6만 원을 넘어선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이 지난해 말부터 올해 2월 항소심 무죄 선고 후까지 여러 쇄신책을 고민했지만 결국 결단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재용 회장의 사즉생 메시지의 진정성과 절박함을 훼손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1995년에 ‘애니콜 화형식’ 등 충격 요법을 잇달아 실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재용 회장의 ‘독한 삼성’ 선언이 ‘제2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될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이재용 회장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길어도 연말까지는 결판이 날 것입니다. 독해져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재용 회장 본인입니다. 2025년은 삼성 부활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