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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MBK '김병주 도서관'에 대한 소고

Numbers_ 2025. 3. 2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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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MBK '김병주 도서관'에 대한 소고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뉴타운 가운데에는 몇 년째 공터처럼 남아 있던 공원이 있다.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해오긴 했지만, 좀 더 쓸모 있는 시설이 있으면 이용하기 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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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뉴타운 가운데에는 몇 년째 공터처럼 남아 있던 공원이 있다.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해오긴 했지만, 좀 더 쓸모 있는 시설이 있으면 이용하기 편한 위치였기에 아쉬움도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의 기부로 시립도서관이 들어서게 됐다는 소식에 환영의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거기에 쓰인 건 김병주 도서관. 낯선 이름이었다. 큰 기업의 사장도, 유명한 연예인도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동네에 숨겨진 오랜 의인이거나, 아니면 뜻있는 자산가겠거니 생각하며 요란했던 착공식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지금 가재울뉴타운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누군지 알게 됐다. 그나마 가까운 대형마트여서 종종 찾던 홈플러스가 법정관리로 넘어갔다는 뉴스에서였다. 이를 결정한 최대주주가 MBK파트너스란 사모펀드고, 그 주인이 김병주 회장이라고 했다.

그 뒤에는 김 회장과 그의 사모펀드가 홈플러스를 법원으로 넘긴 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따라붙었다. 사모펀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언젠가 들었던 기업 사냥꾼이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MBK와 김병주는 그렇게 다시 이들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회사를 사고파는 일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까지 사모펀드의 이미지가 어둡게 각인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외국계 사모펀드에게 크게 휘둘린 경험이 트라우마가 됐다. 이어 론스타 사태가 화룡점정이었다. 해외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2003년 8월 옛 외환은행을 사들여 9년 뒤인 2012년 하나은행에 되팔며 4조원 넘는 차익을 챙겨간 사건이다.

그래도 비가 온 후 땅이 굳는 격이었을까. 외국 자본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 토종 사모펀드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힘입어 2004년 우리나라에도 공식적으로 사모펀드 제도가 도입됐다.

그렇게 첫발을 뗀 국내 사모펀드 시장도 어느덧 스무 살을 넘겼다. 이미 한 세기 넘는 역사를 쌓은 글로벌 사모펀드와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청년의 체격 정도는 갖췄다. 2023년 말 기준 출자 약정액은 136조원, 펀드 수는 1126개로 급성장했다.

그동안 사모펀드는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 왔다. 나라 밖에서부터 씌워진 굴레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국산 사모펀드들로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야 했다.

사실 김병주 회장이 이끄는 MBK는 이 과정에서 선구자적 존재였다. 국내 사모펀드 시장의 초기 단계부터 함께 성장을 지속하며 코웨이와 ING생명, 홈플러스, 두산공작기계 등 굵직한 인수합병 거래의 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이런 면에서 홈플러스에 대한 MBK의 결단은 뼈아프다. 역시 사모펀드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자신이 힘겹게 쌓은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다. 이른바 주인 있는 오너 기업이라면 위기에 빠졌을 때 회장이 나서 고개를 숙일 거라는 정서 속에서, 하루아침에 회사를 법정관리로 밀어 넣는 행보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MBK 입장에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이성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비난이 커지면 위정자는 답을 내놔야 한다. 사모펀드에 대한 인정과 함께 하나둘씩 풀어 온 규제 족쇄를 다시 채워야 한다는 명분이 힘을 얻을 수 있다. 가뜩이나 정국 분위기도 그렇다. 어느 때보다 화가 가득한 여론의 불똥이 언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MBK는 뒤늦게나마 행동에 나섰다. 소상공인들의 피해가 없도록 김 회장이 사재를 털겠다고 했다. 다만 홈플러스의 회생절차가 시작된 이번 달 4일부터 이 같은 입장을 발표한 16일까지 열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김 회장이 18일 국회 정무위원회 증인으로 채택되고도 두문불출한 건 또 다른 문제다.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명성을 쌓으려면 20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토종 사모펀드의 무대가 마련된 지 20년이 흐른 시점, 그 위에서 가장 빛나던 MBK가 손가락질을 당하게 됐다. 2년 뒤 김병주 도서관이 완공되는 날 지역 주민들의 시선이 어떨지는 오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부광우 자본시장부장 boo@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