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수 전 KB금융지주 CFO
세상만사의 유일한 변수는 시간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반영된 플로우(Flow) 개념의 ‘변화, 과정, 생명’과 관련이 깊은 말이다. 100 퍼센트 ‘완벽, 절대, 완성’ 이라는 말은 시간이 멈춘 스톡(Stock) 개념의 ‘정지, 결과, 죽음’을 의미한다. 살아 움직이는 세상 모든 일은 플로우 개념으로 봐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금융위기도 마찬가지이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금리는 돈 값이다. 금리 변동 추이는 돈을 빌릴 수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금리가 경제 상황의 가늠자인 것이다.
2000년 1월 9%로 출발한 한국채권시장 대표금리 국고채 3년물이 2007년 10월 5%대에서 코로나 팬더믹 와중인 2020년 10월말 0.94%까지 지속적으로 낮아졌다. 최근 글로벌 시장금리 급상승으로 2023년 10월 23일 현재 다시 4%대 초반으로 반등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상황에서 금융투자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더 높은 기대수익은 그만큼 더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위험과 수익이 교차하는 금융시장에서 일반투자자들이 안심하고 돈을 맡기도록 하려면 설득 논리가 필요하고 마케팅 바람을 일으키려면 ‘프레임(Frame)’ 설정이 중요하다.
기대수익률이 월등히 높지는 않지만, 상응하는 위험수준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고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다. 이런 컨셉으로 ‘예금-채권-주식’을 다양한 금융기법으로 잘 버무리고, 위험과 수익을 적절히 조합하여 ‘중위험, 중수익’으로 정의하고 유통시장을 조성하였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는 소명(召命)은 상품 공급자인 금융기관 스스로 사명감과 심리적 만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떤 위험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확률에는 신뢰구간과 오차가 있다. 믿을 수 없는 영역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뜻이다. 중위험과 중수익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시장상항에 따라 고위험 저수익도 되고 저위험 고수익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부담하는 위험에 비해 더 높은 수익을 욕심내는 순간 중위험 중수익의 콘셉트는 틀어지게 된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충격으로 수많은 중국펀드 가입자들이 단기간에 손쓸 틈도 없이 큰 손실을 입고 심한 고통을 받았다. 은행에서 판매되는 ‘펀드’가 증권사 창구를 통해 거래되는 ‘주식’ 보다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다고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실제 개별주식보다 펀드가 위험 분산효과 때문에 가격변동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펀드가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정 지역이든 어떤 시점이든 발현되는 리스크는 편중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금융위기 이후 공모펀드 기대수익율과 시장위험 통제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한 투자자들은 공모펀드시장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2007년 8월 70%에 달하던 공모펀드 비중이 2023년 10월 현재 28%로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공모펀드 시장 열기가 식고 저금리 기조가 장기간 이어지는 국면에서 투자상품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의 니즈가 일치되는 새로운 상품과 마케팅 프레임이 필요했다. ‘중위험 중수익’ 상품은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한 상품 공급자(금융기관)와 저금리 시대 수익률에 갈급한 투자자들을 유혹하기에 아주 좋은 콘셉트의 마케팅 툴이다. 특히, 위험 선호도가 낮고 보수적인 은행판매 채널에서 ‘중위험 중수익’ 콘셉트는 대고객 소구력이 상당히 높은 매력적인 판매 전략이다.
ELS(주가연계증권)는 2002년 7월 증권회사에 장외파생상품 업무가 허용되고 증권거래법 시행령에 반영되면서 개발되기 시작한 상품이다. ELS 도입 초기에는 채권을 활용한 안전한 원금보장형 ELS가 주류였다. 위험은 낮고 수익율은 정기예금 보다 약간 높은 ‘중위험 중수익’ 콘셉트로 운용되었다. 그런데,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걱정했던 ‘금리생활자가 굶어 죽는 상황’인 실질금리 제로(Zero) 수준 상황이 상당기간 이어지면서 정기예금보다 약간 높은 수익률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점차 최근 대세로 자리잡은 조기상환형 ELS가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기상환형 ELS는 예금보다 높은 중수익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정한 요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원금의 일부(대략 30~40%)를 잃을 수도 있는 원금비보장형 계약이다. 평상시 보험료를 받아 운영하다가 사건이 발생하면 보험금을 대신 물어주는 보험계약과 유사한 리스크를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적(보통 3~6개월)으로 꼬박꼬박 남겨주는 수익이 정기예금 금리보다 상당히 높다는 학습효과가 생기면서 시장이 평온한 시기에는 고객들도 위험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은연중에 ‘중위험, 중수익’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초기에 출시된 ELS들은 채권과 주식, 또는 개별회사 주가(보통 2개)를 기초자산으로 하여 만든 ‘주식형 ELS’ 상품이 많았다. 이후, 주요국의 주가지수에 연동하는 ‘지수형 ELS’, ELS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F 등 다양한 상품이 출시되었다. 그 중에서 주력이 되는 ‘지수형 ELS’는 대부분 한국 KOPSI200, 홍콩 HSCEI, 미국 S&P500, 일본 NIKKEI225, 유럽 EuroStoxx50 등을 기초자산으로 한다. 2020년 이후 발행된 ELS 중에서 해외지수형 ELS 비중이 88%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요즘 홍콩 HSCEI(H지수)가 편입된 ELS상품 가입자들은 아마도 밤잠을 좀 설칠 것 같다. 코로나 팬더믹 이후 미중 패권 갈등과 중국 경제 침체 지속, 동유럽과 중동 전쟁 등의 영향으로 홍콩 H지수가 거의 45% 이상 하락해 있다. 2021년 1~3월 1만1000 포인트 대에 있던 홍콩 H지수가 2023년 10월 23일 현재 5871 포인트로 주저 앉아 있는 상황이다. 당분간 단기에 지수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LS 만기가 보통 3년인 점을 감안하면 2024년 1~3월까지 홍콩 H 지수가 적어도 7700 포인트(가입 시초가의 70% 수준) 이상으로 회복이 안되면 상당수의 투자자들이 원금손실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파생상품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H 지수 회복 때까지 더 기다리고 싶어도 못한다. 만기에 손익을 확정하고 정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1년 1~3월 기간 중 해외지수형 ELS 발행규모는 약 11.3조원(208만건)에 달한다.
밤잠을 못 자고 설치는 사람은 ELS 투자자 뿐만은 아니다. 평소 잘 아는 고객에게 정기예금을 해지하고 ELS 가입을 권유한 금융기관 직원들 역시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다. 위험자산 투자시에 갖춰야 할 각종 사전 점검 사항들을 깨알같이 써서 안내하고 미리 확인해서 불완전판매 이슈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원금손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창구 앞에 앉아 있는 고객을 대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객 손실위험을 특별히 관리할 수 있는 묘안도 없다. 가입시 체결된 계약에 의해 예비된 순서대로 진행되는 상황을 관찰하고 미리 알려주는 것이 전부이다. 홍콩 H지수가 회복되길 기도하며 하늘에 맡기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식시장 활황기에 출시한 ELS, 펀드 등은 상품 제조공급자 입장에서 투자자금을 모으기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하지만, 시장이 하락 반전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원금을 잃을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은 커진다. 상품 가입시점과 만기시 시장상황에 따라 중위험 중수익의 착각이 깨지고 고위험 큰 손실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경기와 시황이 가장 좋지 않을 때 투자한 사람이 돈을 잃을 확률이 낮은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많다. 투자의 대가들이 분출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권하는 것도 다 이런 연유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역사적으로 이런 상황이 항상 반복된다는 것이다. 2015년에도 홍콩 H지수 하락으로 관련 ELS 가입자들과 금융기관 직원들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행히 곧 바로 지수가 급반등하여 큰 소동 없이 잘 넘어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번갈아 가며 지나간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지…’ 탄식이 나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 때 그것을 선택한 사람 누구에게나 모두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때가 되면 일어날 일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때를 정확히 알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자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제된 욕망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상상하고 선택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은 행복을 ‘소비의 양을 욕망의 크기로 나눈 함수’로 정의했다. 갖고 싶다는 정신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물질적 소비활동에서 행복감(효용)을 얻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소비의 대상인 상품은 유한하고, 경제적 지불 능력도 한정되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지만 각자 욕망의 크기는 자기 처지에 따라 어느 정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욕망을 잘 조절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인 셈이다.
‘중위험 중수익’ 은 위험은 덜 지고 수익은 안정적으로 더 많이 가져가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전략이다. 이 콘셉트는 자본주의 경기 싸이클 부침에 따라 모양을 바꿔가면서 투자시장의 유용한 마케팅 프레임 스테디셀러로 살아남을 것이다. 다만 이 상품의 투자자나 공급자 모두 절제된 욕망 아래로 흐르는 지혜를 바탕으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를 분별하고, 원칙을 잃지 않을 때 진정한 ‘중위험 중수익’의 안정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정상에 멈춰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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