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조원태는 없고, 방시혁은 있는 것

Numbers 2023. 11. 13. 16:58

 

“본질은 아티스트와 팬들의 행복이다. 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과 미래를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SM인수를 추진했지만, 오히려 아티스트와 팬을 배려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하이브스럽지 않다”

지난 3월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서울에서 열린 관훈포럼에서 한 말이다. SM 인수전에서 하이브가 카카오에게 패한 게 아니냐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방 의장은 이같이 답했다. 

방 의장은 2019년부터 SM인수를 준비했다. 케이팝 분야에서도 삼성전자나 현대차에 비견되는 글로벌 기업이 등장해야 한다는 오랜 바람에서다. 

SM 인수 추진만 4년. 글로벌 케이팝 기업의 탄생을 목전에 둔 방 의장은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평화로운 인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인수 시장은 과열돼 흡사 전쟁을 방불케 했다. 주주가치와 시장가치, 시장질서가 훼손될 수 있었다. 이는 SM인수 시나리오에 없던 내용이다. 

방 의장은 SM 인수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신 ‘가치 집중’을 선택했다. 기존의 로드맵대로 ‘갈 길’을 가기로 했다. 그는 “이렇게까지 괴로운 게 맞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슬프고 밤잠을 못잤다”며 아티스트와 팬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방 의장의 말을 두고, 공감을 가장한 변명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방 의장이 ‘성공한 사업가’ 이지만 수많은 히트곡으로 심금을 울린 ‘성공한 작곡가’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그는 작곡을 “주변의 상황에 굴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빙의’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잡아내는, 피를 짜내는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국민가요 ‘총 맞은 것 처럼’이다.  

방 의장은 SM 인수를 포기했지만 케이팝 성장의 한 축인 SM의 지배구조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미래 플랫폼 사업에 대해 카카오와의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인수합병(M&A)을 기업과 시장의 성장을 위한 전략이 아닌, 기싸움 내지는 승패가 결정되는 전쟁으로 규정짓는 세간의 인식에 경종을 울렸다. 

M&A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오너의 철학과 의사결정이다. 방 의장의 철학은 냉철한 자기 객관화, 그리고 본질에 집중하는 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방송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개그맨 유재석과 나눈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방 의장은 하이브를 운영하면서 한 차례 크게 휘청였다. 빚은 무려 100억원이 넘었다. 이때 방 의장은 스스로 방만 경영을 했다고 판단, 뼈 아픈 반성과 함께 경영권을 모두 전문경영인에게 넘겼다. 음악과 케이팝 산업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결정이다. 

본질에 집중하는 힘은 방 의장의 전공인 ‘미학’에서 다져졌다. 현대 기업은 빠르고 과밀한 경쟁에서 계속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를 단기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 '무엇이 변하는가'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본질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모두 방 의장의 말이다.

국내 인수합병 시장, 나아가 M&A를 추진하는 기업 총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국내에서는 장기적인 성장보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기업의 잠재력, 나아가 시장 질서를 훼손하는 경우가 더러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M&A 추진이다. 그 중심에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있다. 

한진그룹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국적기 보호 정책아래 19년간 국내시장을 독점했다. 이 때문에 고객 편의가 저하되고 대한항공의 경영체질 개선이 늦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1986년 들어 항공업계가 국제화·자유경쟁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대한항공의 독점 문제는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1988년 아시아나항공이 탄생하면서 국내 대형 항공시장은 본격 경쟁체제에 돌입했다. 

아시아나항공 탄생의 본질적 가치는 ‘고객 편의’에 있다. 그동안 대형 항공사 경쟁 체제가 유지된 것도 고객 편의라는 핵심 가치 때문이다. KDB산업은행과 조 회장은 다시 34년 전으로 돌아가 해묵은 카드 ‘단일 항공사’를 본질 가치라고 내세우며 양사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과연 단일 항공사 설립이 ‘고객 편의’를 포기하면서까지 추진할 가치가 있는 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 추진으로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가치 하락, 나아가 국가 경쟁력 저하까지 감수하는 형국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기업결합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아시아나항공의 황금 노선 슬롯을 포기하는가 하면, 아시아나항공의 실적에 큰 기여를 하는 화물사업부까지 내다팔겠다는 결정을 하면서다. 

나아가 우리 사회는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방 의장은 관훈포럼 자리에서 기업의 통합과정에서 수 많은 시간과 노력이라는 리소스, 구성원의 감정 노동이 수반되며 이를 가벼이 여기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합병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나항공 이사회 결정 과정에서 동반된 수 많은 갈등, 대한항공 내부의 반대 목소리, 아시아나항공 구성원의 고용 불안, 사회적 찬반 논쟁은 이미 돈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업계에서 ‘누구를 위한 인수합병인가’라는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가치를 잃은 양사 합병 추진이 조 회장의 경영권을 사수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점이 특히 아쉬운 대목이다. 2021년 경영권 사수가 위태로웠던 조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명분으로 산업은행의 지원을 받았다. 그 덕에 조 회장은 반대 세력을 제치고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업과 시장의 성장을 도모해야 할 M&A가 승패를 결정짓는 도구가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철학이 실종된 의사결정의 차이다. 시가총액 8조3000억원 규모의 하이브의 지분 31.6%를 보유한 방 의장은 시장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 반면, 시총 3조1000억원 규모의 한진칼 지분 5.8%를 보유한 조 회장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초래했다. 

방 의장은 미래 성장이라는 핵심 가치에 지독하게 매달린 반면, 조 회장은 과거 독점이라는 라떼 시절에 지독하게 집착하고 있다. 방 의장은 자신을 포함한, 아티스트, 나아가 국가적 브랜드 향상이라는 ‘성장’을 낳았다. 조 회장은 자신의 경영권을 사수하고 독점 체제를 이룰 지 몰라도, 소비자 피해를 키우는 동시에 국가 항공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비극을 낳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나항공 합병에 100%를 걸었다. 무엇을 포기하든 성사시킬 것이다” 지난 6월 튀르기예 이스탄불에서 가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는 조 회장의 이같은 맹목적 철학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자신에게 고객, 기업, 시장, 산업, 국가에 대한 애정이 있는 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측은지심이 있는 지 돌아보고, 나아가 무엇이 자신이 사수해야할 핵심 가치인지 고찰할 때다. 

조아라 기자 archo@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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