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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1000조원 국민연금의 말과 행동

Numbers_ 2024. 4. 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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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1000조원 국민연금의 말과 행동

이사장 말과 주총장에서 보팅 달라 ‘구설’삼성물산 트라우마…민감한 사안 수책위로자본시장 최고권력…더 신중하고 절제해야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적립금이 1036조원이나 됩니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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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 말과 주총장에서 보팅 달라 ‘구설’
삼성물산 트라우마…민감한 사안 수책위로
자본시장 최고권력…더 신중하고 절제해야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적립금이 1036조원이나 됩니다. 기금 규모가 2000조원에 육박하는 일본 공적연금과 노르웨이 국부펀드에 이어 세계 3번째입니다.

더욱이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기관투자가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투자 기업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됐습니다.

김태현 이사장이나 서원주 기금운용본부장의 말 한마디에 연임을 노리던 KT와 포스코 회장이 나가떨어집니다.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거나 행동주의 펀드가 주총에 개입한 금호석유화학 삼성물산 등에서는 국민연금이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 회사의 명운이 갈립니다. 매년 3월 주총 시즌이 되면 기업들은 국민연금에 줄을 대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닙니다.

스튜어드십과 밸류업을 명분으로 정치권력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CEO가 있으면 국민연금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고 내쫓습니다.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은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들의 압박이 늘어나고 경영권 분쟁이 잦아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지자 국민연금 핵심 인력들을 스카우트해 창구로 활용합니다.

그렇다고 국민연금이, 국민연금 이사장이 마음대로 모든 걸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과 연초에 걸쳐 포스코홀딩스 회장 선임에 개입했습니다. 김태현 이사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포스코홀딩스의 회장 선임 절차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하고, 내외부 인사가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태현 이사장의 발언은 3연임을 추진했던 최정우 회장에 대한 반대는 물론 내부 출신 인사의 회장 선임 반대였습니다. 김 이사장은 한발 더 나아가 ‘호화 이사회’ 논란을 빚은 일부 사외이사들의 재선임에도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이 같은 압박에도 포스코홀딩스는 최정우 회장이 퇴임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외부 출신이 아닌 내부 출신 장인화 전 사장이 신임 회장에 선임됐고 유영숙 권태균 사외이사는 모두 연임됐습니다. 포스코홀딩스 주총에서 국민연금은 장인화 회장의 선임이나 유영숙 권태균 사외이사 선임에 모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국민연금 이사장의 발언과 국민연금의 보팅(voting)이 서로 달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주총장에서 국민연금이 주요 사안에 찬성할지 반대할지는 국민연금 이사장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일반 사안이면 이사장 통제를 받는 기금운용본부 내의 투자위원회가 하지만 기금운용본부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는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수책위)로 넘겨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수책위는 사용자 근로자 지역가입자 추천 인사 6명과 관계전문가 3인으로 구성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전담 기구입니다. 따라서 국민연금 이사장이나 기금운용본부장이 수책위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이번 포스코홀딩스 주총에서 장인화 회장 선임이나 유영숙 권태균 사외이사 연임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김태현 이사장이나 서원주 기금운용본부장이 아닌 국민연금 수책위가 내린 결정입니다. 포스코홀딩스의 사례를 보면 지난해 초 KT 이사회가 국민연금 이사장과 기금운용본부장의 엄포에 겁먹어 물러서지 않고 포스코처럼 똘똘 뭉쳤다면 어떨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해집니다.

기금 규모가 1000조원을 넘는 무소불위의 국민연금이지만 큰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2015년 당시 옛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정권의 외압에 굴복해 합병을 찬성했다는 이유로 홍완선 당시 기금운용본부장이 구속돼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자본시장에서 알아주던 실력자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홍완선 당시 본부장은 기금운용본부 내 투자위원들에게 합병에 찬성하도록 유도하고 국민연금에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연금은 민감한 사안이 있으면 기금운용본부가 직접 결정하지 않고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로 넘겨버립니다. 포스코홀딩스 주총과 관련해 김태현 이사장의 공개 발언과 국민연금의 실제 보팅이 달랐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김태현 이사장의 입장과 달리 국민연금 수책위는 장인화 회장후보도, 연임을 앞둔 두 사외이사도 결격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옛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한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의 구속은 국민연금이 기업들 주총에서 표를 던질 때 기계적이고 보수적으로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국민연금은 KT&G 주총에서 1대 주주인 국책은행 IBK기업은행과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가 반대한 방경만 사장 선임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영국계 행동주의펀드 등이 1조원 넘는 과도한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요구한 삼성물산 주총에서는 회사 측을 지지했습니다. 가족 간에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금호석유화학과 한미약품 주총에서는 기존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박찬구 회장과 송영숙 회장 측을 지지했습니다.

국내 유가증권시장의 시가총액은 2000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어서 국민연금이 1000조원 자산을 모두 국내 주식에 투자한다면 모든 상장사 지분을 50% 살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5% 이상을 가진 국내 상장사만도 300개에 육박합니다. 국민연금은 그야말로 국내 자본시장에서 최고의 권력입니다.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간 옛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사건 때처럼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칠 것입니다.

‘노자’에서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2개의 문구를 꼽으라면 치인사천 막약색(治人事天 莫若嗇)과 치대국 약팽소선(治大國 若烹小鮮)입니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아끼고 절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뜻이고,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을 삶을 때처럼 천천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물은 오로지 아래로 흘러 바다를 이루고, 산은 높음을 자랑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하늘에 닿는다고 했습니다. 최고의 자본권력 국민연금 김태현 이사장이나 서원주 기금운용본부장이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그들의 언어와 말이 보기에도 위태로울 때가 많습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