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디폴트옵션이 퇴직연금 도입 취지 살릴 수 있을까?

Numbers 2023. 11. 28. 15:27

허정수 전 KB금융지주 CFO

기업의 재무적인 건강정도를 체크할 때 재무상태표나 손익계산서 등 정태적(Static) 정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동태적(Dynamic) 경영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현금흐름표(Cash Flow)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은퇴 후 현금흐름 없이 대출 낀 시가 30억 강남 아파트 거주자는 보유세 부담으로 속이 탄다. 세금 걱정하는 친구에게 ‘자랑 질 말라’ 타박하는 또 다른 친구는 비록 집 값은 비싸지 않지만 현직에서 월급이나 안정적인 재테크로 매월 꼬박꼬박 현금흐름이 들어오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근로자들 ‘주된 일자리’ 평균 퇴직연령이 49.3세이고, 정년퇴직 비율은 9.3% 이다. 노동시장에서 실제 은퇴하는 연령이 72.3세(OECD평균 64.5세)이니 평균 23년을 퇴직 이후 노동시장에 계속 남아 일하는 것이다(‘정년제도와 개선과제’, 국회미래연구원, 2023.2).

2024년이면 1기 베이비붐 세대(1955~1964, 776만명) 막내인 1964년생 약 79만명이 법정 정년을 맞이 한다. 2기 베이비붐 세대 (1965~1974, 868만명) 다음으로 인구비중이 많은 연령층이 이미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섰거나 경제활동을 멈추는 은퇴자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다. 매월 정해진 날에 월급을 받아 생활해 온 임금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재직하는 동안 화수분(貨水盆) 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월급의 소중함은 퇴직 이후 현금흐름이 끊어지면서 그 무게가 더 크게 다가온다. 최근 KB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노후 경제적 준비를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는 응답이 전체의 52.5%를 차지하고 있다. 은퇴자들에게 당장 갈 곳이 없다는 심리적 공허함 보다 곧이어 닥칠 현금흐름 중단에서 오는 현실생활의 불안감이 훨씬 클 것이다.

은퇴자들의 현금흐름을 이어주는 대표적인 사회적 장치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이다. 경제성장과 인구고령화가 진전될수록 개인 금융자산 대부분이 공적연금 영역인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풀(Pool)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다. 개인연금까지 준비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2023년 8월말 현재 국민연금 적립규모는 997.4조원, 누적수익률 5.11% 이다. 지난 5년간 국민연금 적립금이 56% 증가했다. 그러나 기하급수적인 은퇴자 폭증과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기금 현금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절박한 상황이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십 수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방향성 조차도 쉽게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목줄이 달려 있는 절박한 이슈인 것이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국민연금에 버금 가는 중요한 개인 현금흐름 원천이 ‘퇴직연금’이다. 2023년 3분기말 퇴직연금 가입규모는 약 350조원이다. 채널별로 은행 182조(52%), 보험 87조(25%), 증권 81조(23%)이다. 자금운영을 회사가 책임지는 DB형이 54.4%(190.3조), 노동자가 직접 관리하는 DC형과 IRP가 각각 25.6%(89.5조), 20%(70.0조)이다. 문제는 수익율이다. 2023년 3분기말 원리금보장형의 장기수익율(3년,5년,7년,10년)은 모든 금융기관이 1~2%대로 저조하다. 원리금비보장형은 더 형편 없다. 극소수 몇몇 금융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익률 1% 대로 인플레이션 헤지(Hedge)는 고사하고 심지어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인 곳도 다수 있다. 미래 안정적 현금흐름 확보로 노동자들 은퇴 대비를 돕는다는 퇴직연금 제도 도입목적과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운용실적이다.

퇴직연금의 표면 수익률 못지 않게 연금 위탁자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수수료 비용수준이다. 2022년말 전체 퇴직연금 적립규모가 330조원,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연간 총수수료 수입은 1조 3231억원이다. 은행 7785억원(0.38%), 보험 2969억원 (0.29%), 증권 2477억원 (0.23%) 순이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년간 약 0.32%의 비용을 지불하고 금융전문가들에게 자산운용을 맡겼는데 2022년 4분기 운용수익률이 0.025%에 불과하고 2분기, 3분기는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이기도 했다.

2017년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erway) 연례주총에 글로벌 패시브(인덱스형) 펀드 창시자인 뱅가드 투자그룹 창업자 존 보글(Jhon Bogle)이 초대되었다. 수수료 비용이 비싼 유명 액티브펀드(헤지펀드) 보다 저렴한 패시브펀드 투자전략이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워렌 버핏과 테드 세이즈(Ted Seides, 헤지펀드 ‘프로테제 파트너스,Protégé Parters 공동창업자)가 펼친 10년에 걸친 세기의 내기 결과 발표를 앞둔 시점이었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 몇 일전에 테드 세이즈는 공식적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워런 버핏이 선택한 ‘뱅가드 S&P 500 인덱스펀드’ 10년 수익률(125.8%)이 헤지펀드 전문투자자 세이즈가 고른 5개의 ‘재간접펀드(Fund of Fund)’ 수익률(36.3%)을 월등히 능가한 것이다(‘투자의 구원자들’, Robin Wigglesworth).

워런 버핏은 투자시장에서 중간에 끼인 소위 ‘금융전문가’(Middle Man)들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에 매우 인색했다.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비해 챙겨가는 수수료가 너무 많고 결국 투자자들이 누릴 수익율을 낮춘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싼 수수료 비용을 차감한 수익률이 시장평균수익율을 넘어설 확률은 그만큼 낮아질 수 밖에 없다. 각자 32만불을 베팅한 내기는 10년 후 220만달러로 불어나서 버핏 가문이 후원하는 자선단체 걸스(Girls Inc. of Omaha)에 기부되는 선행으로 이어졌다.

2023년 3분기 우리나라 퇴직연금 운영 형태는 원리금확정형이 87.2%이다. 원금 손실 회피의 보수적 운영을 하는 것이다. 퇴직연금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잘 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보수적이라는 말이 적극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통의 직장인들은 본인의 퇴직연금을 수시로 들여다 보며 포트폴리오를 적기에 재조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수수료를 지불하고 전문운용회사에 위탁한다. 그런데, 운용을 수탁한 금융사들이 자산을 불리지는 못하고 매번 수수료만 챙겨가는 불편한 상황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부터 논의가 시작된 퇴직연금운용 ‘디폴트옵션제도’ (사전지점운용 제도)가 우여곡절 끝에 2023년 7월 12일 도입되었다. 1~2% 수준에 머물고 있는 퇴직연금 운용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투자성향 분석 후 가입자가 운용상품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 상품 만기일로부터 6주 동안 현금성 자산으로 운용한 후 사전에 지정된 운용방법으로 퇴직연금을 강제로 운용, 관리하는 제도이다. 그동안 많은 근로자들이 퇴직연금을 적립만 해 놓고 거의 방치하여 전반적인 수익율 저조로 이어지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목적이다. 퇴직연금은 장기운용자산이기 때문에 작은 수익률 차이에도 미래 향유할 수 있는 수익의 차이가 매우 크다. 개인들의 은퇴 후 안정적인 현금흐름 확보를 위해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는 일은 가입 당사자 개인 뿐만 아니라 노후빈곤율과 국가 재정지출을 낮출 수 있는 국가적 과제인 것이다.

2023년 3분기 현재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제도 가입대상(DC형과 IRP)은 전체 퇴직연금적립액의 45.6%(159.5조원) 이다. 디폴트옵션에 실제 가입한 비중은 전체 대상의 3.2%로 아직 저조하다. 채널별로는 은행 4.3%, 보험 3.2%, 증권 0.4%이다. 제도도입 후 경과기간이 짧은 영향이 클 것이다. 디폴트옵션 운영 형태도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89.3%로 절대적으로 높다. 그만큼 보수적으로 관리한다는 뜻이다. 디폴트옵션의 연평균 총수수료 비용은 저위험 0.36%, 중위험 0.57%, 고위험 0.75% 내외로 상당히 높다. 그런데 저위험, 중위험, 고위험 등 리스크를 부담하는 자산운용수익률은 최근 1개월 , 3개월 수익률이 모두 마이너스이다. 물론 운용기간이 짧아서 더 지켜봐야 하지만 오히려 수수료가 없는 초저위험군은 모두 플러스 수익률을 시현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디폴트옵션이 퇴직연금 본연의 역할을 지원하는 건강한 제도로 자리매김 하려면 수수료 수준과 실질적인 수익률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디폴트옵션제도는 지금까지 거의 방치 상태에 있던 퇴직연금 운용에 대한 가입자들의 관심과 수익율 제고에 많은 보탬이 될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은퇴자들이 좀 더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좋은 제도이다. 다만 워런 버핏이 싫어하는 중간관리자들이 챙겨 가져가는 수수료가 수익 기여도와 서비스 수준에 대칭적인 합리적 수준일 때 가능할 것이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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