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착한 규제, 나쁜 규제, 멍청한 규제

Numbers 2023. 11. 20. 15:54

허정수 전 KB금융지주 CFO

국가는 공동체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구성원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하고 규제하는 일을 한다. 대부분의 규제는 사회적 가치증진이라는 선의로 출발한 ‘좋은 규제’로 시작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당초 기대와 정반대 결과로 귀결되는 경우도 많다. 선한 의도의 ‘좋은 규제’가 ‘나쁜 규제’로 바뀌는 것이다.

 

규제 의도가 불순하고 합리성이 결여되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멍청한 규제’도 많다. 국가의 규제는 선한 의도 못지 않게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1865년 영국의 적기법 (Red Flag Act, 증기자동차 운행 규제)은 마부들 생존권 보장이라는 ‘위장된 선의’로 도입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 자동차산업 발전을 지연시키고, 독일과 제조업 경쟁에서 열세에 몰리게 한 ‘멍청한 규제’의 표본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금년 2월부터 금융당국은 ‘은행권 경영, 영업, 관행, 제도개선 TFT’ 운영을 통해 금융관련 6대과제를 선정하고 다양한 규제 혁파를 시도하고 있다. 과점체제인 은행업의 시장기능과 효율을 증진시키고 금융서비스의 소비자 선택권을 넓힌다는 명분이다. 경쟁촉진으로 은행 이윤 증가를 완화하고 정상가격 이내에서 가격이 결정되도록 금리체계와 운용관행을 개선한다는 ‘선한 의도’로 출발했다.

 

 

우리나라 시중은행들의 상품과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는 거의 대동소이 하다. 포트폴리오 측면에서 중소기업 지원 의무가 부과된 지방은행과 중금리대출 확대 부담이 주어진 인터넷은행이 약간 다를 뿐이다. 모두 규제 영향이 크다. 2023년 상반기 국내은행들 중 4대 시중은행 점유율은 원화대출평잔 51.6%, 영업이익 48.8%, 당기순이익 44.5% 수준이다(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 시중은행 몇 개가 더 추가되어야 국내 은행산업 과점체제가 해소되고 효율성이 확보될 수 있을까?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소비자 금리선택권 강화를 위해 대환대출 플랫폼 운용대상을 신용대출 뿐만 아니라 금년 12월말까지 주택담보대출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은 ‘좋은 규제’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불편하겠지만 금융 소비자들은 정보 비대칭성 완화로 비교가능성이 높아지므로 합리적 선택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고정금리 대출비중 확대를 적극 유도하는 조치는 ‘나쁜 규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대출금리 절대수준이 높아져 있고 정책금리 향방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금융소비자 입장에서 고정금리 비중을 지금 시점에 늘리는 것이 유리한 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경제주체들은 매우 영리하게 행동한다. 급격한 금리 상승기에는 고정금리가 유리하다는 정도는 모두 다 안다.

 

미리 사전에 움직여야 하는데 그 시점을 알기가 쉽지 않다. 상황변화 과정에 대응할 뿐이다. 외환위기 이후 시장금리 대세 하락기였던 2010년까지(COFIX 출시전) 은행 주택담보대출은 대부분 CD연동 변동금리였다. 그 당시 은행들은 CD연동 대출자산에 과도하게 편중된 구조 완화가 절실했다. 은행 자산부채계정(ALM Book)의 마이너스 금리갭(Interest Gap) 축소를 위해 고정금리 스왑거래(Swap)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금리하락 국면에 대응했다.

2023년 6월말 현재 1031조원에 달하는 주택담보대출의 금리유형이 변동형 60.3%, 고정형(혼합형, 정책모기지론 포함) 39.7% 수준이다(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2012년 21.3% 수준에서 그동안 고정형 비중이 꾸준히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은행 자체적인 순수 장기고정형 비중은 아직도 3% 이하로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10년 이후 대출금리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인데도 은행은 자체 고정금리 비중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은행이 금리변동 리스크 부담을 일정기간 동안(주로 3년~5년) 고정된 ‘혼합형’이나 주택금융공사 ‘정책모기지론’으로 관리한 것이다. 주택담보대출 신규금리가 2013년 3%대로 처음 진입한 이후 코로나 팬더믹 기간중인 2021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2~3% 수준으로 낮게 지속된 영향이 크다.

2022년 4분기 이후 고정형금리 수준이 변동형 보다 상대적으로 큰 폭으로 낮게(0.23%~0.78%) 유지되자 2023년 상반기 신규주택담보대출의 고정금리 비중이 70~8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결과적으로 대출 소비자들이 시장상황에 영리하게 잘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변동의 금리수준 차이와 함께 향후 금리 상승이 예상되는 시그널인 장단기금리차 확대 역시 금융소비자들의 고정금리대출 선택 비중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분석된다(한국은행 보고서, 2022.10). 물론 금융당국의 고정금리 비중확대 유도 정책도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은 대출금리 절대적 수준이 매우 높아져 있다. 국내 4대은행 신규주택담보 평균대출금리는(일시상환)가 2021년 6월 2.51%에서 2023년 9월 4.95%로 2.4% 포인트 이상 상승했다. 중앙은행 정책금리 방향도 바뀔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고정금리대출 비중을 늘리도록 유도하는 것은 금리변동 리스크를 소비자들에게 전가시킬 가능성을 키운다. 2011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고정금리대출 비중 확대를 유도했지만 이후 지속적인 시장금리 하락으로 고객 부담만 증가시킨 꼴이 됐다.

정부가 정책의 방향, 원칙, 기준을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제시하여 예측 가능성을 높이면 각 경제주체들은 최선을 다해 적절하게 대응한다. 장기고정금리 비중이 높아지면 은행이든 대출 차입자이든 어느 한쪽은 금리변동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금융기관 금리리스크 관리 실패의 대표적 사례가 1980년대 후반 미국 저축대부조합(S&L) 대규모 파산사태이다.

 

단기 변동금리 조달로 장기고정금리대출을 하고 모기지채권(Mortgage Bond) 유동화를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며 성장하는 것이 S&L의 사업모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만연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하여 폴 볼커(Paul Volker)의 Fed(Federal Reserve)가 급격하게 금리를 인상하면서 1991년까지 전체 25%에 달하는 S&L이 금리리스크관리 실패로 파산하였다. 자본시장이 발달하고 모기지 유동화시장이 잘 정착된 미국에서 고정금리대출 헤징(Hedging)을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대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금융중개 기능이 핵심인 은행이 금리 미스매치 관리를 위해 자산부채 듀레이션 갭을 가급적 제로(Zero) 수준에서 일정한 범위내로 관리하려는 이유이다. 개인과 달리 은행은 조달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대출자산의 금리 유형 관리만으로는 리스크관리가 충분하지 않다. 개별 경제주체들은 각자의 처지가 모두 다 다르다. 당국이 일률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칫 가까운 장래에 ‘나쁜 규제’로 평가될 개연성이 커진다. ‘나쁜 규제’가 항상 문제가 된다. ‘멍청한 규제’는 상식적으로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멍청한 규제’의 표상은 중국에도 있었다. ‘제사해(除四害,참새, 쥐, 파리, 모기) 운동이 좋은 예이다. 대약진운동 와중인 1955년 농촌 현지지도에서 모택동 주석 손가락질 한번과 즉흥적 훈시가 가져온 참새 박멸이 수많은 중국 인민대중을 아사지경(餓死之境)으로 몰고간 역설을 말한다. 횡재세 신설, 공매도 금지, 고정금리 유도, 플랫폼 규제, 의료정보 개방, 에너지 정책, 메가시티 추진 등 최근 쏟아지고 있는 여러 논란들은 ‘좋은 규제’, ‘나쁜 규제’, ‘멍청한 규제’ 중 어디에 속하게 될까?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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