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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경제의 사법화’와 오너경영의 종언

Numbers_ 2024. 6. 1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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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경제의 사법화’와 오너경영의 종언

‘정치의 사법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민주적 공론화 과정을 통해 풀어야 할 중대한 정치적 사안을 법원의 판결을 통해 해결하려는 현상을 말합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판결이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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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사법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민주적 공론화 과정을 통해 풀어야 할 중대한 정치적 사안을 법원의 판결을 통해 해결하려는 현상을 말합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판결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분쟁 양상도 복잡해지면서 각 분야의 갈등이 수사기관과 법원으로 몰리는 게 한편에선 불가피하지만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정치의 사법화’는 필연적으로 ‘사법의 정치화’를 부릅니다. 사법의 정치화는 공정성 객관정 신뢰성이 전제돼야 할 법원 판결이 국민감정과 여론에 의해 특정 세력을 편드는 판결을 하거나 어느 쪽으로부터도 욕먹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타협적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일종의 포퓰리즘적 판결입니다. 법관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대중의 관심이 높을수록, 사회적 이슈가 되는 재판일수록 사법의 정치화 현상은 심해집니다. 

정치의 사법화, 여러 사회현상의 사법화와 함께 ‘경제의 사법화’도 빠르게 진행 중입니다. 그 부작용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세기의 판결’이라는 SK의 이혼 소송을 비롯 하이브 분쟁, 스마일게이트 오너의 이혼 소송, LG 가문의 상속 분쟁, 한국타이어와 한미사이언스의 가족간 분쟁 등 한둘이 아닙니다. 법원 판결에 따라 해당 기업의 지배구조가 달라지고 심할 경우 주인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점에서 법원이 해당 기업의 운명을 쥐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 서울고법은 이혼 소송 판결에서 최태원 회장이 노소영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같은 날 서울중앙지법은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최대 주주인 하이브를 상대로 제기한 의결권행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민 대표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SK 재판은 이혼에 대한 책임과 재산분할이 핵심이고 하이브 민희진 재판은 경영권 탈취 여부가 본질이어서 전혀 별개지만 공통점이 많습니다. 

우선 두 재판 모두 여론의 관심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노소영 관장과 민희진 대표가 기자회견이나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사건을 지속적으로 이슈화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소영과 민희진은 ‘여성이며 약자’인데 반해 최태원과 방시혁은 ‘남성이며 강자’라는 구도가 형성됐습니다.

노소영과 민희진이 여성인 것은 맞지만 객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노소영은 ‘대통령의 딸’로서 서민들과 비교하면 평생 귀족처럼 살았습니다. 민희진은 자수성가한 경우지만 연봉만 5억원이 넘고 어도어 지분 가치만 1000억원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노소영과 민희진은 약자 프레임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재판에서 이겼으며, 여론은 재판 결과를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반면에 ‘강자 최태원’은 SK그룹의 1대 주주이자 오너로서의 지위가 위협을 받습니다. ‘강자 방시혁’도 분쟁 장기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경제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로 인해 재판부가 여론을 의식해 약자 편을 드는 판결을 한다면 비단 SK나 하이브만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LG 상속 분쟁 판결이나 스마일게이트 이혼 소송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서울서부지법 민사부에서 진행 중인 LG가 상속회복청구 소송은 구본무 회장이 남긴 2조원의 유산을 놓고 구광모 현 LG그룹 회장과 화담 회장의 미망인 김영식 여사 및 두 딸이 같은 편이 돼 벌어지는 재판입니다. 법 상식으로 보면 화담 회장 타개 후 구광모 회장에게 경영권 관련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화담 회장의 유언을 반영해 유족 간 합의가 이루어졌고, 3년의 ‘제척기간’까지 지나 기존 합의문을 뒤집고 상속재산을 다시 분할하자는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예측불허입니다. 

LG가 상속 분쟁도 굳이 말하자면 ‘강자’인 구광모와 ‘여성이자 약자’인 미망인 및 두 딸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화담 회장의 유지와 무관하게 기존 합의문을 뒤집고 법정 상속 비율대로 부인 1.5 아들딸 각 1의 비율로 다시 상속재산을 분할하라는 판결이 나온다면 LG그룹은 장자 승계라는 오랜 전통이 깨지는 것은 물론 그룹 지배구조에도 일대 파란이 예상됩니다. 

경제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로 인해 예측이 더 어려워진 곳은 스마일게이트 창업자이자 오너인 권혁빈 최고비전제시책임자(CVO)와 배우자 이 모씨의 이혼 재판입니다. SK 재판처럼 가정법원에서 진행되고 그만큼 재판부의 재량과 주관적 판단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다 ‘강자’인 오너 회장과 ‘약자이자 여성’인 배우자 이씨의 대결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된 것도 권 CVO 입장에선 크게 불리합니다. 

물론 최태원 회장과 스마일게이트 권혁빈 CVO의 이혼은 성격이 좀 다릅니다. 최태원 회장은 외도를 했기 때문에 '유책배우자'로 비난받지만 권혁빈 CVO는 회사 일에 몰두것 외에는 별다른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책배우자' 인정을 둘러싸고서부터 논란이 예상됩니다.

스마일게이트 이혼 소송에서 배우자 이씨는 권혁빈 CVO가 갖고 있는 스마일게이트홀딩스 100% 지분 중 절반인 50%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씨 측은 자녀 양육 외에도 스마일게이트 창업 초기 공동창업자로 경영에 참여한 점 등을 내세웁니다. 

이에 대해 권혁빈 CVO 측은 이씨가 경영을 책임졌을 경우 지금의 스마일게이트를 있게 만든 ‘크로스파이어’ 같은 온라인 게임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반박하지만 이씨 측이 승소할 경우 스마일게이트 지배구조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현행 상속세율은 대주주 할증을 포함 최대 60%이고 일부 공제 혜택을 감안해도 50% 이상을 상속세로 내야 합니다. 따라서 웬만한 그룹이면 2세나 3세들이 물어야 할 상속세는 수천억원에서 조단위를 넘고 맙니다. 이 같은 거액의 상속세를 현금으로 내긴 어렵고 결국 주식으로 물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식이 1명이 아니고 2명 3명만 돼도 2~3대로 내려갈수록 지분은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한국의 오너 경영 체제는 이제 수명이 끝났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오너가 외도든 가정에 소홀해서든 이혼하게 되면 ‘사업용 재산’과 ‘특유재산’까지도 분할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또 LG 가문의 상속재판이 시사하듯이 오너경영을 유지하기 위해 장자에게 ‘경영재산’을 몰아주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어렵게 됐습니다.

과거 재계 총수의 형사사건에서는 ‘3·5법칙’이라는 게 있어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웬만하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해 구속하지 않고 풀어주곤 했는데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재용 회장 최태원 회장 모두 오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제 민사·가사 재판에서도 ‘경제·경영적 고려’는 없습니다. 경영자의 개인사와 무관하게 기업의 지배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경영권 행사가 가능하게 사업용 재산 또는 경영재산을 재산분할에 따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가 필요한데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앞지르는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를 있게 만든 오너경영은 이제 그 막을 내리는 듯합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