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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인간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인문학 만한 게 없다며 손자인 이재용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 보냈다. 장차 스스로 일군 그룹을 물려받을 지도 모를 후계자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데 그만한 학문이 없다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역사에서 무수히 많은 흥망성쇠를 간접 경험해 경영자로서 통찰과 직관을 갖고 그 속에서 사람을 부리는 방법을 배우기 바랐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창업 86주년(1938년 삼성상회 설립 기준). 이 창업회장과 아들 이건희 회장을 거쳐 3대에 이른 '이재용 시대'. 삼성은 지금 안팎으로 여러 도전을 받고 있다. 이건희 회장 사망에 이어 지배구조 개편을 둘러싼 사법리스크 풍파를 거친 가운데 그룹의 중추인 삼성전자의 주가는 연일 바닥을 치고 있다. 이제는 심리적인 마지노선인 주당 5만원대 마저 붕괴됐다.
삼성전자는 올 3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9조 1000억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약 3.7배 늘었지만 글로벌시장에서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산업 사이클이 범용 D램에서 HBM으로 옮겨간 데서 원인을 찾는다. 이제는 삼성전자가 점유율 1위를 점하고 있는 D램마저도 점차 수요가 줄고 있다. 그룹 계열사로 눈을 돌려보면 삼성전자를 제외한 금융계열사와 상사, 중공업 등 비금융계열사들이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 수년전 신사업으로 시작한 바이오부문이 있으나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삼성을 이끄는 총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청년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 회장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나온 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지만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98년 결혼 뒤 부인과 함께 다시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 이 회장의 유학시절 일화가 남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회장은 숫자에 관심 많았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 수시로 자신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시가를 확인했다. 미국 현지에서 전화를 걸어 재무임원으로부터 주식의 현재가치와 자산현황을 일일이 보고를 받을 정도였다.
당시는 그가 삼성전자를 떠나 있을 때다. 지금도 이 회장은 주가와 민감한 실적 수치를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측근들에 따르면 분기 또는 연간 기준 매출과 영업이익 성과에 극도로 민감하다. 기업가치 제고가 주가 부양의 지름길인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좋지 않아서 '삼성 위기론'을 외쳤겠나.
최근 삼성의 상황을 놓고 강력한 오너십과 그룹 전반을 아우르는 로드맵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창업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사업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 이념으로 가업을 일궜다. 1950년 전후 혼돈기 주변 만류를 뿌리치고 제일제당을 설립해 국내 최초로 설탕을 생산했다. 이어 제일모직공장과 비료공장을 잇달아 차리고 1976년 컬러 TV를 자체 개발했다. 국가 미래 발전과 연계되는 건설개발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윤을 쫓는 기업가의 행보였지만 국가성장과 국민 삶의 질적 개선과 궤를 같이 했다. 또한 기업의 미래가 사람에게 있음을 알고 인적자원을 소중히 여겼다. 한 식구가 된 조직 구성원들과 그의 꿈을 같이 공유했다. 전국 각지에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창업주 바통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신경영 시대를 열었다. 1995년에는 휴대폰 '애니콜' 초기제품의 불량률이 11%를 넘기자 15만의 휴대폰을 불태우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이를 지켜보는 2000여명의 직원들 중 일부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같은 극약처방 덕에 삼성은 글로벌 휴대폰 제조기업을 누르고 국내 휴대폰 시장 점유율 1위로 도약했다.
모든 것은 숫자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그룹 경영의 성과와 기업가치를 대변하는 주가가 실적으로 포장된 숫자에만 좌우되지 않음을 두 선대회장이 몸소 증명하고 있다. 때로는 숫자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오늘을 사는 원동력이 된다. 그게 사람 사는 이치 아니겠는가.
길진홍 산업부 부국장 road@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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