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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쌓은 명성 계엄선포로 5분 만에 무너져
대통령이 태극기부대·보수 유튜버와 같은 생각
경제 불확실성 최대 리스크…위기 오래 갈듯
#“명성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워렌 버핏)=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문은 200자 원고지 8장 분량으로 이것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38초였습니다.
현재 계엄령이 선포된 나라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입니다. 미얀마도 2021년 총선에 불복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필리핀에서는 2017년 민다나오섬 반란으로, 남미 에콰도르에서는 올 1월 교도소 폭력 사태를 계기로 소요가 확산되자 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는 지난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선진국그룹으로 승격됐지만,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2002년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을 계기로 2000년대 초반부터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지표도 우리가 선진국임을 보여줍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지난해 기준 대만과 일본을 추월했고,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 중에서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6위입니다. 명목 GDP(국내총생산) 기준으로도 세계 10위권입니다.
이런 대한민국이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우크라이나 미얀마 필리핀 에콰도르와 같은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선진국 취급을 받기 시작한 지 20여년 만에 5분여의 비상계엄 선포로 필리핀 미얀마 수준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행운과 불행 사이에는 비대칭이 존재합니다. 행운은 아무리 크더라도 한 번에 위대한 국가, 위대한 기업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번의 심각한 불운, 심각한 하나의 재앙은 나라든 기업이든 순식간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외신들은 윤 대통령의 계엄선언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입힌 상처와 대가가 너무도 크다고 지적합니다. 윤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국이 그동안 이룬 많은 성과를 훼손했고 민주화를 이룬 1987년 이후 한국의 지도자가 행한 최악의 일을 저질렀다고 평가합니다.
#“정치인이 신비로운 용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경계해야 한다. 특히 희생 영원 자유 행복 등을 듣게 되면 경보음을 울려야 한다.” (유발 하라리)=윤석열 대통령은 5분여의 비상계엄 선포문에서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는 파렴치한 종북 세력들을 척결하며, 국민의 자유와 안전,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강조합니다. 윤 대통령은 “국회가 범죄자 소굴이 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됐다”고 진단하면서 “패악질을 일삼는 망국의 원흉, 파렴치한 반국가 세력들을 반드시 척결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유 행복 등의 신비로운 용어를 넘어 패악질 괴물 원흉 처단 등 대단히 적대적이고 극단적 용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상계엄 선포문이라고 해도 대통령의 용어로는 부적절합니다. 품격이라곤 없습니다.
#‘윤석열 미스터리’, 대통령은 ‘태극기부대’고 극우 유튜버다=늦은 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지금과 같은 AI시대에 특히 SNS가 활성화돼 나라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시절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을 벌였습니다. 더욱이 계엄이 선포되면 즉시 다수당인 야당의 해제 결의로 무산될 게 뻔한데 왜 비상계엄을 선포했을까요.
탄핵을 밥 먹듯이 하고 경찰의 대공 수사 특활비까지 삭감하는 야당의 행태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짧으면 6개월 길어도 1년만 기다리면 정치 라이벌 이재명 대표가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확정받아 대권주자 반열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왜 그걸 참지 못하고 계엄령 선포라는 정치적 자폭행위를 했을까요.
왜 윤석열 대통령은 60년 전의 박정희 시절, 40년 전의 전두환 시절로 돌아가려 했을까요. 내각의 많은 참모들이 계엄령 선포를 말렸는데도 왜 윤 대통령은 상기된 얼굴로 계엄령 포고문을 읽고 말았을까요.
왜 윤 대통령은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 조국 박찬대 김민석 정청래 등 야당 의원들 외에 여당인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 권순일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여론조사 업체를 운영하는 방송인 김어준 등을 체포하라고 했을까요. 비상계엄 선포 당시 왜 계엄군 수뇌부는 많은 군인들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보냈을까요. 모두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윤석열 미스터리’입니다.
정답은 윤석열 대통령이 이른바 ‘태극기부대’나 극우 유튜버들과 거의 같은 생각과 사상 체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가 국회의 해제 결의로 무산된 후 매일 광화문 일대에서는 태극기부대와 극우 유튜버들이 주도하는 집회가 열립니다. 여기서 나오는 구호가 ‘문재인·이재명 구속’ 외에 ‘한동훈 구속’입니다. 또 이들은 지난 4월 10일 총선은 물론 과거 국민의힘이 패한 선거는 모두 여론조작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중앙선관위를 제대로 수사해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윤 대통령을 태극기부대나 극우 유튜버와 같이 놓고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당연히 여당의 한동훈 대표도 잡아 가둬야 하고 부정선거와 관련됐다고 보는 권순일 김어준 등도 그냥 둬선 안 됩니다. 윤 대통령이 거친 말을 쏟아내고 주변 참모들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조언을 안 듣는 것도 당연합니다.
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가짜이고 함량 미달인 게 많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조차도 마속을 잘못 판단했다며 스스로를 책망하고 한탄합니다. 윤 대통령이 이 정도일 줄은 모두 몰랐습니다. 덕이 없는데 지위는 높고 지혜는 없는데 도모하는 것이 크고 힘이 없는데 맡은 것이 무거우면 개인도 국가도 예외 없이 불행해집니다.
#경제는 불확실성이 최대 리스크=정치는 이상이지만 경제는 현실입니다. 비상계엄의 후과(後果)는 최후에 경제로 나타납니다. 해외 순방 때마다 기업 총수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원팀’을 외치던 윤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우리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습니다. 한국경제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시계(視界) 제로’ 상황으로 몰렸습니다. 관세 위협과 반도체 2차전지 등에 대한 보조금 철폐를 외치는 미국의 ‘트럼프 2기’ 출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비상계엄 사태로 자본시장에서는 투자자금이 역대급으로 탈출합니다. 반도체 석유화학 배터리 철강 등 한국경제의 주력 산업들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치적 대혼란까지 겹치면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연초부터 공들여 추진했던 증시 ‘밸류업’은 계엄령 선포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습니다. 특히 금융주들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1%대를 각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에서 최대 리스크는 불확실성입니다. 아무리 악재라도 확실히 드러나기만 하면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 리스크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야든 탄핵이든 비상 거국내각이든 임기 단축 개헌이든 여야가 빨리 합의해 결론을 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문제는 우리 정치권이 그럴 능력이 있냐는 것입니다.
예상대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여당 반대로 무산됐고 윤 대통령은 본인 임기를 포함한 정국 안정 방안을 여당에 위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홍준표 대구시장의 지적대로 여당이 그럴 능력이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특히 여당으로의 대통령 권한 위임은 초헌법적이어서 야당은 물론 국민들도 이런 수습책을 받아들일지 의문입니다.
헌법을 봐도 윤 대통령은 하야나 탄핵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게 싫고 퇴진 압박을 견딜 자신이 있으면 현직을 유지하고 대통령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면 됩니다. 결국 뉴욕타임스 등이 분석했듯이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정치적 혼란과 경제의 불확실성은 오래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비상계엄과 이후 탄핵정국에 따른 경제적 영향이 제한적이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정치는 추하고 사람들은 슬프다=인생은 특별하지 않으며 근심과 고통은 우리 삶의 따돌릴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한국경제도 늘 그랬습니다. 쿠데타와 비상계엄 탄핵 등 정치적 격변은 늘 한국경제의 동반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빠른 산업화를 일궈냈고 중산층을 키웠고 외환위기를 극복했으며 2000년대 들어 마침내 선진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제는 후진국에서나 일어나는 정치적 격변은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겪고 보니 기가 막히고 슬픔까지 밀려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상한 일이 일어나도 세상이 끝나진 않습니다. 해결책은 어딘가에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이라도 적응하면 됩니다. 한편에서는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무섭고 징그러워도 우리의 상처를 똑바로 쳐다볼 때 희망이 생기고 치료도 할 수 있습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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