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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 재무적 데이타 악화 주시해야
밸류업 발표보다 경영판단 실패 수습이 우선
시장 투자자와 채권자 안심시킬 시그널 줘야
봄이 오는 것은 오리가 먼저 알고 겨울은 기러기가 앞서 알린다고 한다. 시그널(Signal)은 상황이 담긴 정보를 알려주는 신호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시그널이 방출된다. 일상의 작은 신호를 포착해 다가올 큰 일에 대비하는 시그널을 놓치지 않는 ‘예민한 촉수’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아남는 훌륭한 자산이다. 큰 위기와 경기침체가 본격화되기 전에 분출되는 시그널을 속칭 ‘전문가’ 조차도 잘못 해석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화를 키운 예는 많다.
최근 롯데그룹이 불길한 시그널을 표출하며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대로 롯데그룹이 무너지는 일은 없겠지만 시그널이 전하는 진실과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롯데그룹이 어렵다는 시그널은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돼 왔다. 롯데그룹의 핵심 비즈니스인 유통과 화학이 수년동안 동반 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부동산 하강국면에 발목이 잡힌 계열 건설사의 유동성위기 시그널이 가장 먼저 세간에 노출됐다. 롯데건설은 소문으로 떠돌던 과중한 부동산PF 우발채무를 올해 3월 은행(선순위 1조2000억원) 증권(중순위 4000억원) 계열사(후순위 7000억원)를 총동원해 급한불은 껐지만 숙제를 뒤로 미뤄뒀을 뿐이다.
롯데지주의 올해 3분기(누적) 영업이익은 전년동기대비 14% 감소하고 금융비용은 20% 증가해 당기순손실 1871억원으로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지분법적용 관계기업의 순손실이 2551억원으로 적자 전환한 영향이 크다. 금융비용 증가와 지분법적용 관계기업의 손실 추세는 2019년 이후 고착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기존 핵심비즈니스인 유통부문이 내수부진 장기화와 이커머스의 습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2023년 7월 인천공항 면세점 철수와 시내 면세점 집중으로의 전략방향 전환은 쇼핑부문 영업손실을 가중시킨 경영판단 실패로 평가된다. 또 그동안 그룹의 곳간 역할을 해온 화학부문이 글로벌 공급과잉과 경기부진이 겹치며 영업이익이 3년 연속 적자행진 중이다. 정유사까지 가세한 제조공정의 혁신(COTC, Crude Oil To Chemical)으로 원가경쟁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대규모 자금(인도네시아 LINE프로젝트 5조3000억원)을 투입한 해외공장 건설은 글로벌시장 공급과잉 확대와 자금부담을 가중시켜 롯데 화학부문의 적자구조 개선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뿐만 아니라 기존 핵심사업 부진을 메우기 위해 추진한 인수합병이나 지분투자가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실적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2021년 이후 IMM PE 등 외부자본을 끌어들여 한샘 중고나라 미니스톱 등에 공동으로 투자하고 2023년에는 일진머티리얼즈(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지분 53.5%를 2조7000억원에 인수한 바 있다.
최근 CEO스코어는 조사대상 500대 기업 중에서 금융회사를 제외한 271개사 가운데 올 3분기 이자보상배율 1을 밑도는 회사가 52개사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기업이 영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금융기관에서 차입한 금융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대기업이 19%에 달한다는 의미다. 특히 2022년3분기부터 이자보상배율 1 미만 상태가 3년 연속 이어지면서 지속성장 가능성이 의심되는 16개 회사 가운데 롯데그룹 소속 회사가 5개씩이나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지난 3분기 말 기준 롯데쇼핑 롯데하이마트의 이자보상배율은 각각 0.70배 0.66배 수준이고 호텔롯데 롯데케미칼 코리아세븐은 영업손실을 기록중이다. 그동안 롯데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온 롯데케미칼은 영업이익 적자가 3년 연속 지속 중이고 코리아세븐 역시 2년 연속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롯데케미칼이 포함된 석유화학업종이 전체 17개 업종 가운데 유일하게 이자보상배율이 1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롯데그룹의 어려운 재무상황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롯데그룹 창업주 고 신격호 회장은 무차입경영 원칙을 고수하기로 유명했다. 기업경영에서 무차입으로 부채비율이 낮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부채비율이 낮다는 것은 동일한 규모의 자본을 투입하는 경우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싼 자기자본 비중이 높다는 의미다. 자기자본을 제공한 주주의 요구수익율이 사채나 대출을 통해 조달한 채권자의 요구수익율보다 높기 때문에 자기자본비중이 높은 기업이 부담하는 자금조달비용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럼에도 97년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부실기업 판단기준으로 기업의 부채비율 수준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무차입경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늘었다. 아울러 인색한 주주배당 관행으로 자기자본비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롯데그룹이 타인자본을 늘려 사업을 확장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사업현장이 주는 시그널을 정확히 해석하고 효과적인 대응전략을 적절히 잘 구사했는지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
지난달 26일 롯데지주는 2026년까지 주주환원율 35% 이상을 지향하고 중간배당과 자사주소각 등이 포함된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롯데지주가 밝힌 소각대상 자사주는 신규 취득이 아니라 2017년10월 지주사로 전환하면서 자회사 분할과 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취득(지분 32.51%)한 주식이다. 그동안 전략적 지분교환 가능성을 포함해 여러 불확실성과 오버행(Overhang) 이슈로 주가상승과 PBR 개선의 걸림돌로 작용해온 자사주 소각 계획은 시장에 긍정적 시그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롯데지주의 밸류업 계획에 시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발표된 내용이 명확한 스케쥴이나 확정된 목표가 아닐뿐더러 기업실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수표로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배당총액과 이미 보유중인 자사주 소각을 포함한 ‘주주환원율 35% 이상’ 달성계획이 시장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회사가 돈을 잘 버는 모습을 먼저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롯데그룹은 해명을 통해 루머로 떠도는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M&A 실패 루머도 3분기 적자 전환한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외에는 단순한 지분투자에 불과해 전략적 판단에 의한 기업인수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의 눈은 롯데그룹이 억울해하는 시시비비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롯데그룹이 내보내는 시그널에 더 주목한다. 기업경영 성패의 시그널은 경영활동의 결과로 쌓이는 재무적 데이터와 비재무적 정보를 통해 흘러나온다. 롯데케미컬 차입금의 기한이익 상실(EOD, Events of Default) 트리거가 된 ‘세전이익이 이자비용의 5배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은 장차 차입금 상환이 어려울 정도로 돈을 잘 벌지 못할 수 있다는 시그널이다. 올해 들어 롯데그룹 주력 계열사 대부분의 신용등급 전망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뀐 것 역시 향후 자금조달이 힘들어지고 금융비용이 상승해 재무상태 악화로 이어질 수 있는 악순환 시그널이다.
시장의 루머를 사실무근으로 일축하며 파장을 신속히 차단하는 롯데그룹의 조치는 적절했다고 본다. 금융시장은 심리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그럴듯한 소문이 문제를 키우고 재무적 어려움을 가중시켜 멀쩡한 기업도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의 근원을 제거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시장과 채권단이 안심할 수 있는 시그널을 보내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 롯데그룹이 롯데케미칼의 EOD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잠실 롯데월드타워까지 담보로 제공하는 노력은 시장에 긍정적인 시그널로 작용할 것이다.
사이클 산업에 속한 기업이 경기침체 국면을 견디는 현실적인 방법은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절감과 경영효율화 외에 뾰족한 묘안을 찾기 쉽지 않다. 사업 구조조정과 자산매각 등 재무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신속한 조치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롯데그룹이 해체위기 논란에서 벗어나 경영정상화의 길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롯데그룹의 긍정적 시그널을 기대한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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