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박종면칼럼] 한덕수의 ‘계지재득’(戒之在得)

Numbers_ 2024. 12. 23. 16:12

▼기사원문 바로가기

 

[박종면칼럼] 한덕수의 ‘계지재득’(戒之在得)

양곡법등 6개법안 거부권 행사는 잘한 일헌재 재판관 임명·쌍특검법 거부 명분없어고건·황교안처럼 노욕으로 무너지지 않길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 출범까지 오대십국 시대에 풍도(馮道

www.numbers.co.kr

 

양곡법등 6개법안 거부권 행사는 잘한 일
헌재 재판관 임명·쌍특검법 거부 명분없어
고건·황교안처럼 노욕으로 무너지지 않길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 출범까지 오대십국 시대에 풍도(馮道, 882~954년)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정치가이자 관료로 73세까지 살면서 50여 년 현역으로 활약했습니다. 정치 혼란기이고 난세여서 다섯 왕조에서 여덟 성씨 11명의 군주를 모셨습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 황제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풍도는 그때마다 기꺼이 응했습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는 훗날 그를 욕하면서 “중국 선비의 절개가 풍도 한 사람 때문에 무너졌다”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구양수뿐만 아니라 후대 중국의 많은 역사가와 정치가들이 풍도를 “누구든 젖만 주면 다 어머니로 불렀다”며 깎아내렸습니다. 

그러나 풍도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평가도 많습니다. 풍도는 우선 자신에 대해 철저했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았고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권력과 재물과 색에 대해 모두 그랬습니다. 정적들이 그를 공격하려 해도 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청렴하고 소박했습니다.

더욱이 풍도는 백성들을 살리는 일이면 체면이고 재산이고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대십국의 난세임에도 문화를 보존하고 국가의 원기(元氣)를 잃지 않고 백성들의 삶이 최악의 상황에까지 빠지지 않은 것은 풍도 같은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멀리 내다보고 국가와 민족을 돌보기 위해 스스로는 절개와 지조, 충절을 모두 버렸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실제로 풍도가 지은 시에는 “내 마음이 곧고 바르고 공명정대하면 야수들 속에서도 몸을 꿋꿋이 세워 잡아 먹히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풍도 같은 인물입니다.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시작한 이래 제6공화국 첫 번째인 문민정부(김영삼)부터 지금의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권과 인연을 맺습니다. 문민정부에서는 통상산업부 차관을, 국민의 정부(김대중)에서는 통상교섭본부장과 경제수석을, 참여정부(노무현)에서는 재정경제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이명박 정부에서는 초대 주미대사를 맡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무역협회장으로 있다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초대 국무총리에 올랐습니다. 정치적 색깔이 없으면서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았기에 보수·진보정권 가리지 않고 그를 찾았고, 그 역시 기꺼이 응했습니다.

한덕수 총리는 1987년 민주화 이래 서로 가장 대비되는 노무현·윤석열 두 정권에서 총 3년 5개월 제일 오랜 기간 총리직을 수행하더니 탄핵으로 드디어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제 제대로 본인의 진면목을 보여줄 때가 온 것입니다.

한덕수 권한대행은 주변에 “권한대행이 내 마지막 공직이다. 탄핵이 두렵지 않다. 모든 의사결정의 기준은 헌법과 법률,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이라고 적힌 명함이나 명패, 시계 등 기념품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의 첫 시험은 양곡관리법 등 6개 쟁점 법안이었습니다. 한덕수 권한대행은 야당이 명백한 입법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탄핵도 불사하겠다며 압박했음에도 양곡관리법,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법, 농어업재해대책법, 농어업재해보험법 등 농업 4법과 국회법, 국회증언·감정법 등 6대 쟁점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매년 1조원 정도의 예산이 낭비되고 쌀의 과잉생산을 부추기는 양곡관리법 등 농법 4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일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결정한 일입니다. 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은 한 권한대행이 지적한 대로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고 기업의 핵심 기술 유출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이들 법안은 모두 야당이 집권하더라도 거부돼야 마땅합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23~24일 야당 주도의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끝나면 이들에 대한 임명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내년 1월 1일이 거부권 법정 시한인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해서도 입장을 내야 합니다. 

이들 사안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야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여야 각 당의 운명과 차기 대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당은 당연히 한 대행에게 헌법재판관 임명권이 없다는 입장이고, 이른바 ‘쌍특검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한덕수 권한대행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답은 스스로 말한 3가지 기준, ‘헌법과 법률,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에서 찾으면 됩니다.‘

우선 헌법재판소 재판관 3명에 대한 임명은 헌법재판소조차 이미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재 재판관을 임명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밝힌 점을 참고해야 합니다. 또 대통령 탄핵이라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중차대한 결정을 6명이 하는 것보다는 국회 추천 몫 3명을 포함, 9명을 채워 하는 게 합당합니다. 여야의 이해나 보수·진보의 유불리를 따져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내란 특검법은 한 권한대행 본인이 수사 대상이고 이미 대면으로 경찰 수사를 받은 사안으로 국민의 70% 이상이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보는 심각한 사안입니다. 또 검찰과 경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경쟁적으로 수사를 벌이고, 윤석열 대통령은 수사기관의 소환 요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야당은 검찰 수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입장이고 경찰은 수뇌부가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 깊이 연루돼 있습니다. 공수처는 인력난이 심각합니다. 

이런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특검으로 수사를 일원화해 신속하게 진상 규명을 하는 게 상식적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내란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건 헌법과 법률,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더라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은 대단히 정치적인 사안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이나 ‘디올백 사건’ 등 김 여사와 관련된 여러 사안은 이번 비상계엄과 탄핵사태의 뿌리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모든 혼란과 불행의 출발점입니다. 국민 여론도 60% 이상이 특검 찬성입니다. 대단히 안타깝지만 김 여사 문제 역시 특검밖에 답이 없습니다. 만약 이번에 거부된다면 정권이 바뀐 뒤라도 반드시 특검으로 갈 것입니다.

내란 특검도, 김건희 여사 특검도 한 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거대 야당은 한 총리에 대한 탄핵에 나설 게 불을 보듯 뻔하고 더 큰 정치적 혼란이 예상됩니다. 야당은 한덕수 권한대행이 양곡관리법 등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여당과 고위 당정협의회를 연 것만으로도 ‘내란 비호세력’이라며 공세를 펼칩니다. 24일까지 두 특검법을 공포하지 않으면 바로 한 대행에 대해 탄핵에 들어가겠다며 으름장도 놓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통령 탄핵으로 권한대행 자리에 오른 사람은 고건 황교안 한덕수 세 사람입니다. 이들 중 고건 황교안 두 사람은 총리직까지 오르는 등 관료로서는 크게 성공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실패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대권 욕심 때문에 망가졌습니다. 평생 일군 명성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처럼 말입니다.

한덕수 권한대행은 스스로 “권한대행이 내 마지막 공직”이라고 말하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오해를 살만한 일도 없지 않았습니다. 지난 8일 당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함께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국정 수습 방안에 대해 공동담화문을 발표한 일입니다. 한 권한대행은 그날 발표한 대국민 담화문을 한동훈 대표가 읽는 순간까지도 보지 못했다고 해명하지만 그 자리는 한 권한대행이 서 있을 곳이 아니었습니다.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도 읽어봤을 고전 ‘논어’ ‘계씨’ 편에는 ‘군자유삼계’(君子有三戒), 즉 군자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3가지가 나옵니다. 젊어서는 색을 조심하고, 장년이 되어서는 다투고 싸움하는 것을 조심하며, 나이가 들어서는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는 노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많은 것을 이룬 뒤에 늘 명심해야 할 구절은 바로 ‘계지재득’(戒之在得)입니다.

다시 중국 당송 교체기 혼란했던 시절의 유명한 재상 풍도 얘기로 돌아가면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참고할만합니다.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고,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안신처처뢰(安身處處牢)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