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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5년간 고려아연은 두 가문 간 끈끈한 우정의 상징으로 불렸다. 그러나 불편한 동거를 해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누가 쥐느냐를 가르는 운명의 날을 앞두고 주주명부에 오른 오너일가 소유 회사들을 짚어본다.
영풍정밀은 최윤범 일가의 가장 든든한 우호 세력이다. 이를 증명하듯 영풍정밀은 최근 1년 만에 장내서 고려아연 지분을 매집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영풍정밀은 내년 11월 말까지 고려아연 주식을 사모을 예정이다. 내년 1월 임시 주주총회 이후 때를 도모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영풍정밀을 MBK파트너스·영풍의 대항마로 꼽는 이유다.
MBK도 탐낸 영풍정밀
영풍정밀의 주주와 경영 구성은 최 씨 측으로 기울어진 양상이지만 장 씨 측의 몫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영풍정밀의 최대주주는 최윤범 회장의 모친인 유중근 씨가 지배하는 유미개발이다. 유미개발 아래로 유 씨와 최윤범 회장 일가 등이 특수관계인으로 묶여 있다. MBK파트너스가 경영 참여를 선언하기 전에는 장형진 영풍 고문과 자녀, 조카들도 유미개발의 특수관계인이었다. 최 씨와 장 씨가 6대 4의 비율로 영풍정밀을 지배했다.
또한 영풍정밀은 최 회장의 작은 아버지 최창규 회장이 경영하는 곳이지만 장 고문도 기타비상무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장 고문은 고려아연 이사회에선 제3자배정 유상증자 등 영풍에 불리한 안건을 다룰 때는 불참하는 방식으로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영풍정밀 이사회에는 매번 출석해 모든 안건에 찬성했다.
이처럼 영풍정밀은 최 씨 일가 소유이면서도 화합의 상징성도 띄고 있어 한 때 MBK파트너스의 공개매수 타깃이 됐다. 특히 MBK파트너스는 당시 영풍정밀을 고려아연의 유의미한 주주로 꼽았다. 고려아연의 피지배회사 가운데 영풍정밀의 지분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금융자산 현금화' 취득 재원에 보태
2020년부터 2023년 사이 고려아연 주식등의대량보유상황보고서가 빈번하게 올라왔다. 당시 고려아연이 신사업 강화 명분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활발하게 추진한 시기로 희석된 지분율을 회복하기 위한 장 씨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최 씨 일가가 경쟁적으로 고려아연 지분을 매집했다.
영풍정밀은 2022년과 2023년 2년 연속 고려아연 주식을 취득했다. 취득 규모는 2022년 461억원, 2023년 41억원 등 총 502억원이다. 지분율은 2021년 말 1.56%에서 2023년 말 1.83%로 높아졌다. 작년 말 기준 고려아연 지분 가치는 1905억원으로 영풍정밀 총 자산(3964억원)의 약 50% 수준에 달했다.
영풍정밀의 본업은 산업용 펌프, 밸브 등을 제조하는 곳으로 주로 석유화학 공장에 납품하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의 사이클과 맞물려 움직이지만 부품 노후 등에 따른 교체 수요도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황을 덜 탄다. 최근 6년간 영업활동현금흐름은 △2019년 175억원 △2020년 80억원 △2021년 187억원 △2022년 127억원 △2023년 203억원으로 꾸준히 100억원 안팎의 현금이 유입됐지만 고려아연을 품을 만큼 넉넉하지 않다.
이에 영풍정밀은 보조적 재원인 '당기손익 공정가치측정금융자산'을 적극 활용했다. 차익 실현을 목적으로 투자한 수익증권, 지분상품 등 채무상품이 당기손익 공정가치측정금융자산에 속한다. 영풍정밀은 평소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을 안전한 금융자산에 묶어두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쌓아왔다.
금융자산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얻는 수익으로 고려아연 지분을 취득했다. 실제, 2022년 당기손익 공정가치측정금융자산을 처분해 719억원을 현금화했다. 약 400억원은 채무상품에 재투자하고 나머지는 고려아연 지분을 확보하는데 보탰다.
최근 영풍정밀은 선제적 고려아연 주식 매입을 선언했다. 이는 최 회장 일가가 제리코파트너스라는 특수목적법인을 통해 영풍정밀의 주도권을 지켜낸 이후 나온 조치다. 제리코파트너스를 포함한 최 씨 일가의 영풍정밀 지분은 약 70%다. 향후 '최 씨 일가→영풍정밀→고려아연'으로 이어지는 지분 구조는 더욱 견고해질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영풍정밀은 내년 11월까지 순차적으로 고려아연 주식 3만9254주를 추가 취득해 고려아연 지분을 2.1%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이미 이달 중 보유 현금을 활용해 주식 7670주를 취득했다. 지금 고려아연 주가를 감안할 때 앞으로 1년간 잔여 주식을 취득하기 위해 약 355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전방 산업인 석유화학 산업의 장기간 불황으로 영풍정밀도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지난 5년간 완만하게 성장한 영풍정밀의 수주총액은 작년 말 1273억원에서 올해 9월 말 867억원으로 처음으로 꺾였다. 수익성이 정체될 개연성이 큰 만큼 고려아연 주식 매입 시 보조적인 재원으로 금융자산이 큰 힘이 될 전망이다. 9월 말 기준 당기손익 공정가치측정 금융자산은 약 180억원이다.
김수정 기자 crystal7@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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