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수 전 KB금융지주 CFO
태영건설 워크아웃을 두고 채권단과 금융당국, 채무자 간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처지가 다르니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돈 빌려줄 때와 돌려 받을 때 갑과 을이 뒤바뀐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게 실감난다. 최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 강석훈 행장의 강경 발언들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기업이 경영을 잘못하여 망할 위기에 처하면 시장 논리로 보면 망하게 둬야 한다. 기업가치가 추락하고 영위하던 사업이 돈 되는 괜찮은 사업이면 싸게 인수하려는 투자자가 나타나서 정상화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퇴출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상시적인 도산법(倒產法,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과 한시법인 기촉법(企促法, 기업구조촉진법)을 통해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고, 자본시장을 통한 경영권 거래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수준으로 자본축적이 되어 있다.
기업 부실화시에 모든 채권·채무가 동결되고 대주주의 경영권 행사가 제한되는 법정관리를 대신해 워크아웃을 선택하는 주요 이유는 경영유지를 통해 해당회사를 둘러싼 산업 생태계 붕괴를 막고 경영의 조기 정상화를 통해 사회경제적 충격을 최대한 완화하기 위한 것이다. 부실 건설회사 처리과정에서 이해관계자는 채무자(건설사), 은행 등 금융채권자, 협력업체 등 상사채권자, 부동산 수분양자, 그리고 이해관계자 조율과 거시경제 안정적 운영을 책임지는 금융당국이다. 도산법(법정관리) 절차를 밟을 지 아니면 기촉법(워크아웃)을 선택할 지는 각 이해관계의 처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태영건설은 채권자, 금융당국 등과 협의하여 워크아웃을 가기로 선택했다. PF 사업장에 따라 추가적인 자금지원 보다는 법정관리를 통해 채권회수를 선호하는 채권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다수 채권자들과 금융당국, 협력업체, 수분양자 등은 당장 모든 채권·채무가 동결되는 것보다 현재의 경영상태를 유지하면서 연착륙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워크아웃으로 방향을 잡았다. 금융채권자는 추가자금지원 부담에도 불구하고 투자금 회수확률을 높이고, 협력업체와 수분양자들은 납품대금을 받고 준공 후 소유권 이전을 받으려면 진행중인 공사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금융당국은 태영건설 570여개 협력사, 그리고 400여개 금융채권자들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신협, 상호금융, 저축은행 등 서민 예금주들을 불안하게 해 사회적 파장을 키우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대주주인 태영그룹도 금융권 추가지원만 받아낼 수 있다면 경영권도 지키고 추후 경영정상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태영건설이 법정관리로 갈 경우 차입금 4000억원과 3100억원 정도로 알려진 연대보증채무로 물려 있는 태영홀딩스의 재무적 안정과 경영에 상당한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채무자인 태영그룹 입장에서도 법정관리 보다 워크아웃을 선택할 니즈가 컸던 것 같다. 2023년 1월 태영건설 유동성 지원을 위해 태영홀딩스는 에코비트 50% 공동지분 소유자인 사모펀드 KKR로부터 사모사채로 4000억원을 차입하면서 태영홀딩스 채무불이행(EOD) 위험 노출시 담보지분(에코비트 50%) 몰취 조항을 주주간협약(SPA)으로 보장했었다. 따라서 대여금과 연대보증으로 묶여 있는 태영건설 법정관리는 태영홀딩스 재무구조 악화로 에코비트 지분 50%를 빼앗길 수 있는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가 된다. 태영홀딩스 측이 태영인더스트리 매각대금으로 연대보증채무를 최우선 순위로 상환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앞으로 자구안으로 내 놓은 계열사 매각대금을 태영홀딩스 연대보증채무를 갚는데 계속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 윤세영 회장은 태영건설 정상화와 SBS를 포함한 태영홀딩스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것 같다. 선택에 따라 두 상장회사의 대주주 뿐만 아니라 소액투자자들 운명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태영건설 채권단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고 있고 금융당국도 워크아웃 이행 실패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큰 것 같다. 자구안으로 제시한 계열사 매각대금의 활용에 대한 입장차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것이 그 징후일 수 있다. 태영인더스트리 매각대금 2062억원(세후) 중에서 태영건설 경영 직접 책임이 없다는 이유로 블루원 윤재연 대표 지분 513억원를 제외한 1549억원(윤세영 회장 416억원, 태영홀딩스 1133억원)을 태영건설 채무상환 지원을 약속했다. 그런데 쟁점은 890억원이 태영건설 채무가 아닌 태영홀딩스의 연대보증채무 상환에 사용한 것을 두고 채권단과 금융당국, 태영홀딩스 윤세영 회장 간에 상반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최종 채무자인 지주회사 태영홀딩스 빚을 태영건설 자구책으로 마련한 돈으로 대신 갚고 있다는 것이 채권단과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자기 뼈를 깎겠다고 해 놓고 남의 뼈를 깎고 있다”는 격한 반응이 나오는 이유이다.
이제 금융당국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울 것 같다. 기일 도래한 태영홀딩스의 연대보증채무 만기상환 유예 등 워크아웃 이행 분위기 조성을 위한 금융당국 나름대로의 노력과 의도를 무시하고 대주주가 자기이익 챙기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또한 협력사 유동성 지원 등 생태계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건설사가 책임져야 할 공사납품대금을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금융채권)이라는 이유로 지급을 거절한 것은 누가 봐도 사실상 자기 빚을 금융회사로 떠넘긴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태영건설이 제시한 자구안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자금은 정상 매각시에도 대략 1조 6천억원 남짓으로 추정된다. 태영건설이 스스로 밝힌 유위험보증채무(우발채무) 2.5조원에도 훨씬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채권단이 파악한 PF보증채무 잔액 21조 2044억원에는 턱 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단이 신뢰하지 못할 행위를 한다면 워크아웃 이행은 불가능하다. 워크아웃은 이해관계자들이 회사 경영정상화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신뢰가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 중에서도 남의 돈을 빌려 사업을 하다가 잘못해 망할 처지인 대주주의 희생과 절박함이 가장 먼저 확인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대주주가 다른 생각을 하고 워크아웃 제도를 이용해 제 몫 챙기기에 몰두한다면 어떤 채권자도 추가로 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
태영홀딩스 입장에서는 태영건설과 연대보증으로 엮여 있지만 않다면 차라리 법정관리 회생절차로 가는 것이 대주주 실익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빚이 십수조원이 넘고 부동산 경기 불확실성도 큰 상황에서 부실 회사를 살리려다 자칫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당연히 들 것이다. 그동안 대규모 기업집단의 경영부실 책임을 묻고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늘 회자되는 말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된다” 는 것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이러한 자조적인 말이 현실로 확인 될 경우 향후 이 제도를 활용해 건강한 회사로 거듭나려는 다른 회사들에게도 기회가 가지 않을 것이다.
태영건설 워크아웃의 근거법령인 ‘기업구조정촉진법(기촉법)’은 2023년 12월26일 ‘일몰(日沒)’ 조건으로 제정된 한시법이다. 2001년 9월 IMF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신속한 기업구조조정과 회생을 돕기 위해 한시적으로 처음 만들어 운용한 제도이다. 2018년 10월 15일 제5회차 ‘기촉법’이 5년 한시법으로 제정, 운용되어 오다 2023년 10월 15일 자동 소멸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2023년 12월 18일 태영건설 성수동 PF사업장의 만기연장 이슈 발생 직전인 16일에 제6회차 ‘기촉법’이 발의되어 26일 3년 한시법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법 통과 직후에 10일간 연장했던 PF만기일(28일)에 워크아웃을 신청해 태영건설이 6회차 기촉법의 첫번째 적용대상이 된 것이다. 태영건설 워크아웃 이행을 위해 동기 시시비비를 떠나 당국과 이해관계자들이 전방위적으로 기울인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급한 부동산PF 뿐만 아니라 향후 늘어날 기업구조조정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촉법 시행은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부동산 PF 보증규모가 자기자본의 절반을 넘어 100%를 초과하는 건설사도 다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선 대형 건설사들도 많다. PF 보증잔액이 자기자본 100%를 넘는 대형건설사로는 태영건설 373.6%, 롯데건설 212.7%, 현대건설 121.9% 등이며, HDC현대산업개발, GS건설, KCC건설, 신세계건설 등 자기자본 50% 넘는 곳도 여럿 있다. 부채비율 200% 넘는 회사 역시 대부분 PF 보증이 많은 회사들이다. 태영건설 478.7%, 신세계건설 467.9%, GS건설 250.3%, 롯데건설 233.5% 등이다.
건설사들이 자기자본의 3~4배 넘는 부채를 끌어 쓰고 있고 PF보증, 책임준공 등 직간접적으로 부담하고 있는 리스크를 걱정해 신용평가사들은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 밖에 없다. 추가적인 자금조달과 유동성 관리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PF-ABCP 거래량이 급감하고 금융권 대출연장이나 차환도 어려워 유동성이 위축되고 있다. 향후 워크아웃 프로세스에 들어설 건설사들이 늘어날 것으로 다들 전망하고 있다. 이번 6회차 기촉법 시행 후 처음 시행되는 태영건설 워크아웃 처리과정에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다. 향후 제도운용 과정에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별로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자, 채권자, 수분양자, 협력업체, 금융당국 등 각 이해관계자들 입장을 조율하고 운용할 중요한 원칙들이 태영건설 워크아웃 처리과정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 특히, 해당 부실회사 회생을 위한 대주주의 강력하고도 경제적 실질이 담보된 의지 표명과 구조조정 강도 등이 핵심 사항일 될 것이다.
과거 워크아웃 진행을 통해 회생한 건설사는 많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10여년 걸친 노력 끝에 2019년 무사히 워크아웃을 졸업한 건설사는 신동아건설, 동문건설, 고려개발(현 DL건설) 정도로 기억된다. 벽산, 풍림, 남광토건, 우림, 중앙, 한일, 진흥, 월드, 대우차판매 등 대부분은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그만큼 이해관계자들간 조정이 어렵고 그래서 성공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 건설사 워크아웃이다. 건설사 금융채무구조 조정은 주채권은행이 있고, PF 사업장 마다 별도의 대주단이 또 따로 있다. 보유자산 매각이나 자금지원 합의 등 신속한 경영의사결정 추진이 그만큼 어렵다. 공장이나 건물 등 보유 부동산 파악이 비교적 쉬운 제조업과 달리 보유 부동산도 적고, 건설 장비는 대부분 임차로 활용하고, 개발 프로젝트 사업권도 컨소시엄으로 분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워크아웃 진행과정에서 기업가치가 다 빠져나가고 빈껍데기만 남고 결국 다시 법정관리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태영건설 워크아웃이 ‘이익의 사유화(私有化), 손실의 사회화(社會化)’로 ‘회사는 망해도 오너는 살아 남는다’는 오명을 벗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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