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pective

[박종면칼럼] 금융감독의 지혜,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

Numbers_ 2023. 12. 26. 14:30

최근 끝난 은행연합회장이나 생·손보협회장 등 금융협회장 인선은 회원사인 은행이나 생보사 손보사 CEO들이 모여 투표를 통해 뽑는 것으로 돼 있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금융협회장 가운데 실제로 자율성이 보장된 인사는 금융투자협회장 정도에 불과합니다. 생·손보 협회장은 종종 업계 자율적으로 선임할 때도 있지만 은행연합회장 인사는 한 번도 예외 없이 정권 차원에서 챙겨왔습니다. 보수·진보정권 똑같습니다. 

이번 조용병 은행연합회장 인선 때도 그랬던 것으로 은행장들은 증언합니다. 물론 모든 은행장들에게 ‘지침’이 내려온 것은 아닙니다. 몇몇에게만 얘기해도 정부 의중은 전달되니까요. 게다가 이번에는 신한은행뿐 아니라 국민 하나 우리은행 등 4대 금융그룹이 모두 밀었다고 합니다.

금융권에서는 지난해 말 3연임에 대한 금융당국의 불편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연임을 추진하다 회장 추천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용퇴를 선언했던 조 회장이 어떻게 현정부의 신임을 얻어 은행연합회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는지 이런저런 추측이 나옵니다. 

물론 조용병 은행연합회장은 협회장으로서 부족함이 없고 충분한 경륜을 갖춘 분입니다. 정부당국의 지지가 아니더라도 이번에 협회장 인사에 도전한 후보들 가운데 최적의 인물입니다.

문제는 은행연합회장 선임이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금융 CEO 인사는 규정이나 원칙, 제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규정이나 제도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고 이것저것 갖다 붙이다가는 개선(改善)이 아닌 개악(改惡)이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은행지주·은행 지배구조 모범 관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융감독원은 사외이사 지원조직 및 체계, CEO 선임 및 경영승계 절차 등 4개 부문 30개 원칙을 제시했는데 핵심은 다음 내용 정도로 요약됩니다.

“▲기존 CEO가 별다른 검증 없이 연임하거나 자신의 후계자 선정에 입김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이 과정에서 지주 회장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로 이사진을 구축하고 이사회 기능을 마비시키는 ‘참호구축’ 등의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이사회는 현직 CEO나 해당 회사의 거수기 역할을 해서는 안되며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 ▲내부 출신과 외부 출신 CEO 후보 간에 공정 경쟁이 보장돼야 하는데 KB나 하나금융에서 운영 중인 부회장 제도는 문제가 많다. 지금 같으면 폐지하는 게 낫다. 내외부 후보가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비상근 부회장’을 둬 외부 후보에게도 길을 열어줘야 한다. ▲금융지주 산하 은행장이나 보험사 증권사 등 CEO 인사도 지주 회장 마음대로 해서는 안되며 자회사 이사회의 의견을 감안해야 한다.”

이상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지주 부회장 제도가 폐지될 운명에 놓인 것입니다. 4대 금융그룹 회장 중 외부 출신인 임종룡 회장을 빼면 함영주 회장과 양종희 회장은 부회장을 거쳐 회장이 됐습니다. 진옥동 회장도 만약 조용병 회장이 3연임 했다면 은행장에서 물러나 부회장이 됐을 것입니다. 지주 부회장 제도는 은행장 등 계열사 사장을 역임한 후 회장으로 가기 전에 쿠션 역할을 하면서 경영수업을 하기에 아주 좋은 자리입니다.

금감원은 부회장 제도를 유지하려면 외부 후보를 비상근 부회장으로 앉혀 동등한 기회를 주라고 하는 데 현실적으로 이게 가능할까요? 외부에 금융지주 회장직을 충분히 수행할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이 사람이 차기 회장 자리가 100%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과연 비상근으로 오려 할까요? 아니면 자격도 안되는 올드보이 퇴직 인사를 부회장으로 모셔 예우해야 하는데 그 코스트와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금융지주 회장 마음대로 은행장 등 계열사 사장을 뽑아선 안된다는 것은 위험하기조차 합니다. 과거 KB금융과 우리금융에서 회장이 은행장 인사에서 배제된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기해 보면 압니다. 회장과 은행장이 권력 다툼을 벌이다 조직도 당사자도 공멸하고 말았습니다.

금융지주 회장이 이사회에 ‘참호’를 구축해 오래오래 다 해 먹는다는 우려는 금융지주 스스로의 견제·자정 기능과 감독당국 및 언론의 감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걱정입니다.

일례로 하나금융의 경우 김승유가 최측근인 김정태를, 김정태는 다시 측근인 함영주 회장을 자신의 후임자로 지정했지만 후임자들은 회장 자리에 앉자마자 전임자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신한금융 역시 한동우가 조용병을, 조용병은 다시 진옥동 회장을 후임자로 지목했지만 후임자는 취임하자마자 전임 회장의 ‘아바타’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양종희 KB금융 회장도 취임 후 첫 인사부터 전임 윤종규 회장과는 다른 길을 가버렸습니다. 권력이 원래 그렇습니다.

이사회의 독립성을 크게 강화해 이사회가 현직 CEO의 거수기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말이 되긴 하지만 큰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단적으로 2014년 당시 금융계에 충격을 던진 ‘KB금융 사태’는 ‘절대권력’이 된 KB금융 이사회에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복현 원장은 당시 절대권력 KB금융 이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길 바랍니다.

4대 금융그룹 중 우리금융은 한국투자 키움 IMM 푸본 유진 등 과점주주이긴 하지만 나름 주인이 있는 은행입니다. 주인 있는 회사면 주주들이 모여 회장을 뽑으면 그만입니다. 당국이 간섭할 게 아닙니다.

고전 ‘맹자’에는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잊거나 방치하지 말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개입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곡식을 키우는 농부에게만 필요한 지혜가 아닙니다. 요즘 일이 너무 많고 바쁜 금융감독원과 이복현 원장이 사무실에 걸어두고 매일 되새겨 봤으면 좋겠습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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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면칼럼] 금융감독의 지혜,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

최근 끝난 은행연합회장이나 생·손보협회장 등 금융협회장 인선은 회원사인 은행이나 생보사 손보사 CEO들이 모여 투표를 통해 뽑는 것으로 돼 있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금융협회장 가운데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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