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porate Action/소송

[크린랲 경영권 분쟁]① '주식증여계약서'로 갈등 촉발...창업주·장남 간 소송전 전말은?

Numbers_ 2024. 4. 8. 14:20

▼기사원문 바로가기

 

[크린랲 경영권 분쟁]① '주식증여계약서'로 갈등 촉발...창업주·장남 간 소송전 전말은?

자본시장 사건파일식품포장용품 제조기업 크린랲의 경영권 분쟁에서 비롯된 가족 간 법정 공방이 장남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크린랲 창업주인 고(故) 전병수 회장이 장남 전기영씨를

www.numbers.co.kr

 


식품포장용품 제조기업 크린랲의 경영권 분쟁에서 비롯된 가족 간 법정 공방이 장남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크린랲 창업주인 고(故) 전병수 회장이 장남 전기영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주식양도의사표시 및 명의개서)에서 원심의 피고 승소 판결을 지난달 28일 심리불속행 기각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원심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 등의 문제가 없어 재판부가 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절차다.

앞서 1심에서는 전 회장이 승소했으나 항소심에서 뒤집힌 판결은 대법원까지 유지됐다. 전 회장과 그의 장남은 어떤 이유로 소송전을 벌이게 됐을까. 또한 양측의 다툼에 대한 심급별 재판부 판단은 어땠을까. 판결문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 봤다.

 

장남 "전 회장과 주식증여계약"...전 회장 "계약서 위조"

 

재일교포인 전병수 회장은 1981년 한국에서 크린랲을 설립해 비닐장갑, 비닐랩, 지퍼백 등을 생산해 왔다. 지난 2006년 장남이 대표이사를 맡아 회사 경영에 나섰다.

 

(사진=이 사건 판결문 일부)


부자간 갈등의 중심에는 '전병수 회장이 소유한 회사 주식 21만주를 장남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의 주식증여계약서가 있다. 지난 2006년 작성된 계약서에는 전 회장의 성명과 사인이 기재돼 있다. 이를 근거로 장남은 자신이 주식의 소유자임을 주장한다.

전 회장은 계약서가 위조됐다는 입장이다. 장남이 협박과 폭력을 행사하며 경영권 승계를 이유로 회사 주식 양도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 당하자 회사 직원들에게 계약서 위조와 명의개서를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전 회장 측은 주식의 소유권은 차남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지난 2019년 장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1심이 진행되던 지난 2020년 6월 전 회장이 사망해 A씨가 소송수계인(소송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차남은 원고보조참가인으로 재판에 참여했다. 소송 결과에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는 한쪽 당사자를 돕기 위해 법원에 계속 중인 소송에 참가할 수 있다(민사소송법 제71조).

전 회장은 생전에 유언공정증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엔 당시 진행 중이던 또 다른 소송에서 승소해 취득하게 될 주식 등을 차남에게 유증(遺贈·유언으로 증여함)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전 회장은 이번 소송 말고도 주식 증여 등과 관련된 별개의 소송을 진행 중이었다.

장남의 주장. (사진=이 사건 판결문 일부)


재판에서 장남은 전 회장이 지난 2017년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았고, 진료기록 감정 등에 따르면 소송 제기 당시 의사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전 회장과 A씨 간 소송대리권 위임계약은 무효라고 했다. 장남은 유언공정증서 역시 전 회장의 진정한 의사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없고, 기명날인이 없어 무효라고 주장했다. 

 

재판부 "전 회장, 의사능력 없는 상태 아니었다"


이 사안을 맡은 창원지법 민사4부(장우영 부장판사)는 전 회장의 의사능력에 대한 장남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장남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 전 회장이 이 사건 소송 제기 당시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어 유효하게 소송 행위를 할 수 있는 소송 능력을 결여했다거나, 공정증서 작성 당시 전 회장이 유언의 취지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였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사진=이 사건 판결문 일부)



재판부는 △일본의 한 병원에서 실시한 전 회장에 대한 정신 상태 및 치매 정도 평가 검사 결과는 경증 또는 초기 단계의 치매에 해당하는 점 △전 회장이 지난 2019년 소송대리인에게 소송대리권을 위임하면서 위임장에 자필로 성명 및 주소를 기재하고, 공정증서 작성 당시 직접 공증인 사무소에 방문해 유언 취지를 구수(口授·말로 의사를 전함)한 점 등을 바탕으로 판단했다.  

장남 주장과 달리 공정증서 원본에 전 회장의 기명날인도 존재한다고 했다.

 

일본식 한자 익숙한 전 회장...주식증여계약서에 한국식 필순

 

장남이 전 회장 소유의 주식을 증여받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인정하기도 어려웠다. 주식증여계약서에 기재된 전 회장의 성명과 사인이 전 회장에 의해 이뤄졌다고 볼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식증여계약서·소송 위임장·회사 서류에 전병수 회장이 기재한 성명 필적을 분석한 결과 계약서에는 일부 글씨가 한국식 필순(筆順·글씨 쓸 때 획의 순서)으로, 나머지 서류에는 일본식 필순으로 작성돼 있었다.

재판부는 "필순은 오랜 세월 반복해 생긴 개인만의 고유한 글쓰기 습성으로 볼 수 있다"며 "전 회장은 어릴 적 일본으로 이민 가 일본을 근거지로 생활 및 사업을 영위해 온 자로 일본식으로 한자를 읽고 쓰는 데 익숙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전 회장이 소송 위임장 등과 달리 이 사건 주식증여계약서에 굳이 한국식 필순에 의해 자신의 성명을 기재할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크린랲에서 근무한 직원들 증언도 재판부 판단을 뒷받침했다. 한 직원은 전 회장이 도장을 중요하게 생각해 계약을 체결했다면 직접 본인 도장을 찍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전 회장이 계약한 문서에는 일본어 번역문이 붙어 있었는데, 이를 보고 전 회장이 원본 문서(한글 또는 한문 혼용 문서)에 결재나 날인을 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이 사건 판결문 일부)


그런데 이 사건 주식증여계약서는 국한문 혼용체로만 작성돼 있고 전 회장의 일본 인감도장이 날인돼 있지 않았다. 계약서 2부 중 1부에는 계약 일자도 표기돼 있지 않았다.

재판부는 "전 회장은 주식증여계약서가 다른 계약서와 다른 형식으로 작성돼 있고 형식적인 완결성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서 위조됐다고 주장한다"며 "장남은 계약서가 국한문 혼용체로만 2부가 작성된 경위 등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남은 △전 회장이 지난 2016년 '장남에게 주식을 양도했는데 양도 대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횡령죄로 고소한 점 △또 다른 소송의 소장에서는 전 회장이 '장남의 폭행에 의해 주식을 증여했다'고 주장한 점 등을 들며 계약서의 진정성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두 사건의 고소장이 전 회장의 처형에 의해 작성됐다는 등의 이유로 장남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진=이 사건 판결문 일부)


이러한 사정을 종합한 재판부는 "이 사건 주식은 전 회장에게 반환돼야 할 것"이라며 "전 회장은 유언공증을 통해 이 사건 주식에 대한 권리를 차남에게 증여했으며, 주식의 소유자는 차남"이라고 했다. 지난 2022년 1월 재판부는 전 회장 승소로 판결했다.

같은 해 9월 차남 전기수씨가 크린랲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하지만 장남이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장기화됐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박선우 기자 closely@blot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