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룡유회(亢龍有悔), 하늘 끝까지 오른 용은 후회할 일만 생긴다는 뜻입니다. 삭여무여(數輿無輿), 수레 타기를 좋아하면 수레에서 미끄러지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늘 새겨야 할 옛 성현의 말씀입니다.
최고의 자리, 스타의 자리는 영광이 쏟아질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고단한 자리이고 늘 긴장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전체를 이끌기보다 자기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금융 CEO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최근 은행연합회장에 취임한 조용병 전 신한금융 회장은 지주사 회장 재임 6년 중 4년간 ‘채용비리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재판이 끝나면 몇 시간씩 한강을 달리곤 했습니다. 다행히 조 회장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아 은행연합회장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오랜 재판으로 신한금융 회장직에 충실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합니다.
같은 채용비리 재판을 받는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은 1심에서는 무죄였지만 최근 2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뒤집어져 충격입니다. 업무방해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죄명은 조용병 회장과 같은데 조 회장은 1심 유죄에서 2심 무죄로, 함 회장은 1심 무죄에서 2심 유죄로 정반대입니다.
함영주 회장의 사법 리스크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해외 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F) 불완전 판매와 관련해 금융당국으로부터 받은 중징계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재판을 하고 있는데 항소심 결과가 내달 나옵니다.
CEO의 재판은 본인에 그치지 않고 조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부담이 큽니다. 하나금융의 경우 함영주 회장의 채용비리 재판 결과가 지금처럼 집행유예라면 중임은 어렵습니다. 물론 상고를 하는 등 시간을 끄는 전략으로 내년 말 중임을 추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윤석열 정부의 금융당국이라면 중임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함 회장한테 남은 시간은 1년여에 불과합니다. 하루빨리 후임자 승계작업을 서둘러 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법 리스크에 빠진 금융 CEO들은 재판도 재판이지만 현실적으로 변호사 비용도 큰 부담입니다. 재판이 몇 년씩 길어지면 몇 억원 수준이 아니고 수십억원대로 불어납니다. 조용병 회장처럼 무죄 판결을 받는 게 아니라면 변호사 비용은 전적으로 개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금융감독원이 검사를 나오면 이것부터 뒤집니다.
조용병 함영주 회장과 마찬가지로 채용 비리로 재판을 받아 징역 8개월의 형이 확정돼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느라 살던 집까지 팔아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사법부와 금융당국을 상대로 하는 힘들고 고독한 싸움에 박정림 KB증권 사장이 가세했고,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도 저울질하는 모양입니다. 정영채 사장은 우리나라 IB업계의 대부이자 산 증인이고 박정림 사장은 우리나라 금융권의 대표 여성 CEO로서 KB금융지주 회장 후보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증권업계의 저명 CEO 두 사람도 펀드 불완전 판매 사태와 관련한 중징계를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정 사장에게는 ‘문책 경고’를, 박 사장에게는 ‘직무정지 3개월’의 강한 제재를 내렸습니다.
임기 만료를 앞둔 두 사람은 이제 연임이 어렵게 됐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3년 이상 금융사 취업이 제한됩니다. 1982년 대학에 입학한 이들의 연배를 감안하면 장기간 취업이 제한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누구든 60세가 넘어 3년 이상 떠났다가 다시 현업으로 복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라임 펀드 불완전 판매 사태와 관련해 직무정지 처분을 받은 박정림 대표가 금융위를 상대로 직무정지 처분 취소 청구 소송과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법원은 박 대표에 대한 중징계 처분을 일시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금융위가 이번에 유독 박정림 KB증권 대표에게만 2022년 금감원의 문책경고 보다 한 단계 강한 직무정지를 내린 것은 상식적으로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운털 박힌 KB금융’의 연장선에서만 이해가 됩니다. 권력은 때로 무섭고 독합니다.
손태승 전 우리금융 회장은 DLF 사태와 관련해 문책경고를 받고 법적 공방 끝에 최종 승소했습니다. 따라서 펀드 불완전 판매로 이번에 문책을 받은 CEO들도 소송하면 이길 것이라는 게 법률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그러나 금융당국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상대로, 현직도 아닌 퇴직한 상태에서, 자기 돈을 써가면서 소송을 벌이는 것은 결과를 떠나 너무 힘든 일입니다.
‘주역’에 ‘불손익지’(弗損益之)라는 좀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직역하면 덜지 않아야 더한다는 뜻인데, 가장 중요한 인간으로서 도리와 존엄을 덜지 말고 지켜야 세상을 유익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독한 싸움을 하는 금융 CEO들이 가슴에 새길만한 문구입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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