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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인에 유리한 운동장, 본인이 출제하고 시험보는 격
당국은 수수방관…‘모범관행’ 본격 시행도 전에 ‘회의론’
요즘 금융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바로 ‘경영진 참호구축’입니다. 금융지주나 은행처럼 대주주가 없는 소유분산 기업에서 현직 CEO가 자신이 통제 가능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해 감독기관조차 건드리지 못하게 진지(陣地)를 쌓는 것입니다. 성과와 무관하게 연임하고,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제왕처럼 공공성이 강한 기업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고, 폐쇄적인 기업문화를 구축합니다. 심지어 장기 집권 후 퇴직하면서도 자신의 ‘아바타’와 같은 인물을 후임으로 선임해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실제로 참호를 구축해 ‘천년왕국’을 꿈꿨던 전설적인 CEO가 몇 있습니다. 물론 모두 허황된 꿈으로 끝났습니다.
공정성을 통치 철학으로 들고나온 윤석열 정부 입장에서 이 같은 현직 CEO의 참호구축과 내부 카르텔 형성은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해 말 금융사 ‘지배구조 모범관행’을 들고나온 것은 이런 배경입니다.
이복현 원장의 이런 계획들은 현장에서 잘 실행되고 있나요? 현재 김태오 회장의 후임자 선임작업이 끝나가는 DGB금융에서 점검할 수 있습니다. 금감원은 지난해 지배구조 모범관행을 만들면서 대구은행(DGB금융)의 사례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DGB금융은 “2018년 김태오 회장 취임 이래 경영승계 프로그램을 체계화했고, 2019년부터는 ‘핵심인재 육성 프로그램’(HIPO)을 통해 황병우 행장 등 은행장 2명을 성공적으로 선임했다”고 홍보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금융지주 회장 등 CEO 선임은 사외이사들로 구성된 추천위원회가 헤드헌터사를 통해 외부 인사를 추천받고 평판 체크를 합니다. 여기에 CEO 육성프로그램에 의해 선발된 내부 후보들을 합쳐 3~5명의 ‘숏리스트’를 만듭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을 거쳐 사외이사들의 평가 및 투표에 의해 최종 결정됩니다.
이에 비해 DGB금융지주의 회장 선임 작업은 대단히 복잡하고 체계적이며 나름 과학적입니다. 금융권은 물론 소유분산 기업에서 전례가 없습니다. 이렇다 보니 금감원이 DGB금융의 사례를 참고해 모범관행을 만든 것 같습니다. DGB금융의 경우 헤드헌터를 통해 추천받고 평판 조회까지 마쳐 ‘롱리스트’에 포함되면 회추위의 간단한 면접 후 한 달여에 걸친 길고 긴 테스트가 시작됩니다. 우선 전문가 면접이라는 게 있는데 대학교수, 기업출신 전문가, 컨설턴트 등으로부터 90분씩 무려 4번의 심층 인터뷰를 합니다. 2명의 전문가가 1개 조가 돼 전략, 리스크관리, ESG 등 경영 전반에 걸쳐 강도 높게 묻습니다. 다음 단계로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 같은 성격 및 행동 유형 테스트를 온라인으로 합니다. 설문 평가 항목이 3세션에 걸쳐 무려 600가지가 넘습니다. 또 시뮬레이션 테스트라는, 1시간 넘게 주어진 내용을 읽고 20~30분 정도 리포트를 쓰는 시험도 치릅니다. 이처럼 롱리스트에만 올라도 10시간 넘게 테스트를 합니다. 이때 대구에 가면 20만원, 서울에서는 10만원의 거마비를 받습니다.
김태오 회장의 후계자가 되려면 이게 끝이 아닙니다. 숏리스트에 올라 다음 단계의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최종 3인 후보에 뽑히면 우선 이틀간 총 4시간에 걸쳐 외부 전문가 1대1 멘토링이라는 것을 받습니다. 저명대학 교수, HR전문 전직 CEO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이 1시간씩 미래비전 경영전략 등을 묻고 답하는 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외이사로 구성된 회추위원들 앞에서 사업계획 및 미래 비전 등에 대해 1시간 정도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을 하고, 회추위원 투표나 의견 수렴을 통해 최종적으로 차기 회장이 결정됩니다. 물론 이사회 최종 결정 전에 그동안 받았던 두 달여에 걸친 수십 시간의 테스트 결과가 이사회에 전달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보면 DGB금융의 ‘핵심인재 육성 프로그램’(HIPO)을 금감원이 모범관행으로 삼을 만합니다. 어쩌면 앞으로 다른 금융지주들도 DGB금융을 모범으로 삼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외부 인사에 공정하지 않습니다. 3명의 숏리스트에 포함된 황병우 DGB대구은행장은 김태오 회장의 최측근으로 비서실장, 금융지주 이사회 사무국장, 경영지원실장 겸 이사회 사무국장(상무), 그룹지속가능경영총괄 및 ESG전략경영연구소장(전무) 등을 역임하면서 이번에 테스트했던 제도를 만들고 실행한 핵심 인물입니다. 쉽게 말해 문제를 출제한 사람이 수험생으로서 시험까지 본 것입니다. 처음부터 문제와 답을 다 알고 시험을 치른 사람과 처음 문제를 푼 사람 중 누가 유리할까요? 황병우 회장 후보에 대해 DGB금융 안팎에서는 소통을 잘하고, 경영의 연속성도 기대되는 검증된 인물이라는 평을 합니다. 하지만 애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합을 한다면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을까요?
이번 회장 후보 선임 작업을 주도한 외부 평가기관인 ‘무진어소시에이츠’와 ‘EY한영’의 공정성과 전문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국내에는 유명 컨설팅 펌과 헤드헌터사 HR전문 기업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트랙 레코드라곤 DGB금융과의 거래가 절대적이고, 전문인력도 제대로 안갖춘 곳에 왜 회장 선임작업을 맡겼는지 궁금합니다. 내부 인재 육성 프로그램은 이들에 맡기더라도 적어도 회장 선임 같은 중대한 일은 좀 더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곳에 맡기는 게 상식입니다. 더욱이 이 중 한 곳은 김태오 회장 개인과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이 있다는 구설에 시달리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회장 후보를 최종 결정하는 곳은 컨설팅 펌이나 헤드헌터사가 아니고 이사회와 사외이사들입니다. 문제는 사외이사 면면의 구성에서도 여러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현 이사회 의장이 황병우 행장의 논문 지도교수였다는 사실은 단적인 예에 불과합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배구조 모범관행’을 도입함으로써 경영진의 참호구축과 내부 카르텔을 타파하고, 이사회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투명하고 공정한 지배구조를 만들겠다고 거듭 밝혔습니다. 하지만 금감원이 가장 모범적 지배구조라고 칭찬했던 DGB금융에서조차 현실은 이렇습니다.
더욱이 금감원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지역 여론과 4월 총선을 의식해서인지 수수방관입니다. 김태오 회장의 뒤를 이을 신임 DGB금융 회장 후보는 이변이 없는 한 김 회장의 ‘분신’이라는 황병우 현 대구은행장으로 금명 발표될 것입니다. DGB금융에서 ‘천년왕국’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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