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2022년 국내 6대 시중은행과 6개 지방은행이 벌어들인 순이자이익은 대략 37조원이다. 2021년말 대비 21.7%(6.6조원) 증가한 것이다. 원화예수금 1460조원, 자기자본 145조원을 조달하여 원화대출 1393조원, 유가증권 382조원을 운영하여 얻은 결과이다. 2023년 상반기 순이자이익도 전년동기대비 9.7% 증가한 19조원으로 집계되었다. 금년말 전망도 전년수준 이상의 순이자이익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2.1% 증가), 2020년 (마이너스 0.4%) 등 역사적 저금리 국면으로 진입하던 특이 상황을 제외하면 2015년 이후 국내 일반은행들의 순이자이익은 대략 8~10% 내외로 꾸준히 증가했다. 2022년의 순이자이익 증가폭이 상당히 이례적인 수준인 것이다. 코로나 펜더믹 기간중에 취해진 원리금 상환 유예조치 등이 종료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대출금리까지 크게 상승하면서 차입자들이 체감하는 상환부담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게다가 장기간의 경상수지 악화와 역대급 성장 둔화로 경제 불황이 깊어지면서 서민대중의 불만이 정치권으로 향하고 연일 집단적 성토가 다시 금융권으로 집중되고 있다.
2021년말 기준 전체 부채 차입가구들의 가처분소득 대비 대출원리금 상환비율이 평균 28.4%이다. 소득 5분위 23.7%, 중간층인 소득 3분위가 32.1%, 소득 1, 2분위는 53.9%, 43.9% 수준이다. 부채차입 가구의 50.4%가 연간 가처분소득의 32~54%를 대출 빚 상환에 쓰고 있는 상황이다.(가계금융복지조사 소득분위별 가계재무건전성, KOSIS , 2022.12). 2022년 이후 한국은행 기준금리 인상 영향에 따른 시장금리 급상승으로 상환부담은 더 커졌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 장사하는 사람들은 공동체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고 사회적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공공의 적이 되어왔다. 경제상황이 나빠지고 금리가 높아질수록 빌려준 돈을 떼이지 않으면 금융사 이익은 늘어난다. 국가가 정해 놓은 법 테두리 안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거래하며 돈을 버는 것을 비난할 바는 못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돈도 시장에서 거래되는 하나의 상품이다. 그러나 유독 돈 장사는 법에 정해진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견제를 받는다. 수출 제조회사가 어려운 여건에서도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면 칭찬과 찬사가 쏟아진다. 그러나 은행이 같은 상황에서 돈을 좀 벌면 질타의 대상이 된다. 이유는 두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번째, 규제산업이라는 은행업의 특성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맡긴 돈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빌려주는 행위를 국가가 몇몇 은행에게만 허용했다. 독점지대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은행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돈 떼일 위험, 빌린 돈을 제 때에 되돌려 주지 못할 위험, 고정금리와 변동금리 적용 차이로 인해 생기는 금리위험 등 다양한 위험에 노출된다.
위험관리를 잘 못하면 맡긴 돈을 다시 돌려주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만든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막대한 국민세금이 부실은행 정상화를 위해 투입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경험한 트라우마가 있다. 국가가 은행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근거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두번째, 금융의 소득분배 역진성이다. 돈 잘 버는 은행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똑같이 부담하는 부가가치세가 대표적인 역진세이다. 홈리스나 재벌회장이나 소주한병 마시면서 내는 세금은 동일하다. 금융은 역진세 보다 훨씬 더 역진적이다. 신용시장의 작동원리에 충실하면 금융의 소득분배 역진성이 극대화된다. 돈 빌리는 사람이 재산도 많고 돈도 잘 벌면 더 싸게 우대금리를 적용 받는다.
반면, 재산도 없고 돈도 잘 벌지 못하면 신용리스크 프리미엄을 높여서 더 비싸게 페널티성 금리를 물린다. 돈을 빌려 줄 때 가장 중요한 고려요소가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다. 신용도가 돈 값을 결정하는 첫번째 고려 요소인 것이다. 신용이 좋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빌릴 수도 있다.
그런데, 은행이 신용도를 잘 못 판단하여 빌려준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하면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 뿐만 아니라 거래관계에 있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곤경에 처하게 된다. 경제적 약자를 배려하는 분배적 기능은 금융 역진성을 지닌 은행 비즈니스를 통해 직접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금융의 역진성이 강화되고 정교해질 수록 은행 경영의 건전성과 지속경영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민간 주식회사로서 사익 추구와 상충되는 공익 기여를 동시에 강하게 요구 받는 것은 우리나라 은행의 숙명이다. 민간기업인 은행이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배임 등 법적 문제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
국가의 시장 개입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2023년 11월 현재 케이뱅크 신용대출금리는 신용평점이 높을수록 높다. CB 신용평점 1000~951점의 최상위등급 7.51%, 700~651점의 최하위등급 6.16%로 공시되어 있다. 신용등급이 좋은 사람이 케이뱅크에서 돈을 빌리면 더 비싼 이자를 내야 한다. 재산도 있고 돈도 잘 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은행 시스템을 통해 보조금을 지원하는 형국이다.
중금리대출비율을 맞춰야 하는 ‘창구지도’ 영향일 것이다. 시장에서 규제는 이처럼 가끔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일 이런 상황이 좀 낯설다고 느낀다면 자유시장주의자로 분류될 것이다. 반대로 당연하다거나 큰 문제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반시장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규제는 시장의 효율적인 자원배분 기능을 약화시킨다. 그렇다고 금융을 시장의 가격기능에만 맡겨 둘 수도 없다.
규제로 인한 독점 지대 보장과 금융의 역진성은 금융회사가 거둔 이익의 일부를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경제적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반복해서 소환하게 한다. 금융 역진성의 완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함께 은행의 설립과 존립에 국가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국가의 금융기관 경영관여를 주장하는 것이다. 국가는 은행 영업 허가권으로 다른 경쟁자의 시장진입을 막아준다.
중앙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예금자보호제도를 통해 은행의 뱅크런 위험도 낮춰준다. 국가의 역할을 일정부분 분담해야 한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사항들이다. 결과적으로 은행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편하게 돈을 벌고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덩달아 대출금리도 상승하여 이자수익이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시각이다. 이렇게 얻은 과도한 이익을 임직원 성과급이나 주주 배당으로 많이 가져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금융회사들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 좋은 고객을 선별하고 신용평가를 잘해서 돈 떼이지 않게 잘 관리하는 은행경영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국내 일반은행 고정이하여신비율이 2015년 1.14%에서 2023년 0.28%로 크게 낮아진 것은 수익성을 그만큼 개선시키는데 은행들의 노력이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은행의 공익적 역할이 기부나 이익 공유만은 아니다. 오히려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경제주체들에게 잘 배분하는 것이 공익적 가치를 더 높이는 방법일 수 있다.
또한, 매년 기부금 등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모든 금융사들이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다. 위기 때마다 취약 차주들과 서민층 지원을 위한 기금조성과 원리금 감면, 상환 유예 등 나름 성의를 보여왔다. 2023년 8월말 기준으로 금융감독원이 집계한 금융권 상생금융 지원혜택 규모가 약 1조 1479억원으로 추계되고, 8월말까지 기 집행된 실적은 4700억원이다. 취급금액 기준으로 63.9조원이고, 은행 이용고객 174만명이 혜택을 본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급속히 불어난 원리금상환 부담으로 성난 사람들을 달래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금융회사가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예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이익을 낸 것은 사실이다. 한국은행의 통화금융정책이 은행 이자수익 증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2020년 이전 과거 10년 동안 연평균 137.6조원이었던 본원통화(M2) 증가율이 코로나 팬더믹 기간 3년 동안 연평균 304.3조원으로 2.2배 이상 크게 증가했다.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2020년 0.5%에서 2023년 11월 현재 3.5%로 급속히 인상되었다. 당연히 연동되어 있는 은행의 조달금리와 대출금리도 크게 올랐다.
시중은행 원화 순이자마진이 2020년 1.79%에서 2022년 2.07%로 크게 상승한 것이다. 돈이 많이 공급되어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크게 증가하고 은행의 운용자산 규모도 비례하여 증가했다. 2023년 6월말 일반은행(인터넷은행 포함)의 원화예수금은 2019년말 대비 27.7% 증가한 1541.8조원이며, 원화대출은 27.2% 증가한 1460.7조원이다. 특히, 통화량 증가로 자금원가가 저렴한 요구불예금이 222.4조원으로 같은 기간 동안 60.7%(84조원) 증가했다. 마진이 확대되고 운용자산 규모가 증가하면 이익은 늘어난다. 코로나 팬더믹 이라는 경제외적 변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늘어난 통화공급과 한국은행 기준금리 인상이 은행 이자수익 증가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정부 금융정책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늘어난 이익의 일부를 회수하자는 취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공공성과 사익 추구의 적절한 조화가 우리나라 환경에서 은행경영의 지속가능성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금융의 분배 역진성을 완화시킬 수 있도록 금융권 이익의 일정부분을 활용하자는 취지이다. 다만, 예측가능한 원칙과 기준을 만들어 시스템적으로 운영해야 경제주체들의 공감과 정책의 긍정적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매번 이슈 있을 때마다 즉흥적으로 금융권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세우고 이용해서는 곤란하다. 공동체 전반의 신뢰 상실과 갈등 유발로 사회적 관리비용만 증가시킬 뿐이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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