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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조원 영업이익에도 현금흐름은 빠듯
무한 설비투자 반복, 개별기업 감당 ‘한계’
‘빛좋은 개살구’…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
고전 ‘주역’의 64괘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괘는 24번째 ‘지뢰 복’(復)입니다. ‘복’(復)은 절망 속에서 싹트는 희망이며 죽음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이며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입니다. 세상사 죽으라는 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22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반도체 불황이 2년여 만에 끝나고 드디어 호황 국면으로 돌아섰습니다.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젠슨 황의 엔비디아가 이달부터 신형 AI칩 ‘블랙웰’을 출시하면서 반도체 산업은 그야말로 슈퍼사이클에 진입할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AI 반도체에 쓰이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보기 드문 성장동력으로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당연히 HBM 등 고성능 대용량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도 큰 장이 섰습니다. 두 기업의 실적에 파란불이 켜졌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시장 예상치보다 2조원 이상 많은 10조4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것으로 잠정 발표했습니다. 이 가운데 반도체부문(DS) 이익은 최대 7조원으로 추산됩니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올해 최대 40조원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합니다. 지난해 반도체에서 15조원의 적자를 내고 연결기준 6조6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SK하이닉스는 아직 2분기 실적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증권가에서는 영업이익이 2분기 6조원, 연간으로는 최소 20조원, 최대 25조원까지 전망합니다.
2년 만에 찾아온 ‘반도체의 봄’이 반갑고 고맙지만 환호할 일만은 아닙니다. 단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 연간 20조~40조원의 영업이익을 낸다 해도 두 회사의 곳간 사정은 의외로 넉넉지 않습니다.
기업의 자금 사정을 알려주는 지표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 하나가 잉여현금흐름(Free Cash Flow)입니다.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 가운데 영업비용 설비투자 세금 등을 제외하고 남는 현금입니다. 삼성전자의 잉여현금흐름은 21년 18조원, 22년 13조원을 기록하다 지난해에는 13조원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삼성전자는 매년 적게는 40조원, 많으면 50조원 이상 투자해야 합니다. 대부분이 반도체 관련입니다. 지난해에는 무려 57조원을 투자했습니다. 투자는 많은데 지난해 계열사를 뺀 삼성전자 ‘단독 기준’으로 11조원의 적자를 내다보니 현금흐름도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매년 주주 배당만 10조원 정도 합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현금흐름이 좋은 계열사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2조원 차입하고 5조6000억원을 배당받았음에도 최근 들어 시장에서 산업은행 대출설이나 채권발행설 등이 나오는 것은 모두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반도체 산업, 특히 요즘의 첨단 AI 반도체 산업은 무한의 설비투자가 무한 반복되기 때문에 아무리 삼성전자라 해도 개별기업만으로는 투자재원을 마련하기 쉽지 않습니다. 미국 일본 유럽 중국 등이 한결같이 국가가 거액의 보조금을 주고 세제지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삼성과 SK를 보면 반도체 비즈니스는 ‘빛 좋은 개살구’일지도 모릅니다. 실속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남고 뒤로는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첨단 AI 반도체 개발 경쟁이 가열될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될 것입니다.
삼성전자 노조가 연봉 5.6% 인상과 성과급 확대를 요구하며 사상 초유의 파업을 하고 있지만 이런 현실을 제대로 알고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영업이익만 보고 삼성전자를 판단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합니다.
지난 1분기에 25조원의 영업이익을 거둬 올해 연간 영업이익 100조원 돌파가 예상되는 대만의 TSMC라면 몰라도 삼성전자처럼 연간 40조~50조원 벌어서는 현상 유지조차 버겁습니다.
모바일과 가전사업까지 하는 삼성전자의 자금 사정이 이 정도면 오로지 반도체 한 업종만 파는 SK하이닉스의 곳간 사정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SK는 지난달 말 경영전략회의에서 26년까지 80조원을 마련해 AI 반도체 등 미래성장 분야에 투자하고, 3년내 30조원의 잉여현금흐름을 조성하며, 부채비율을 100% 이하로 관리하겠다 선언했지만 쉬운 목표가 아닙니다.
시장 분석을 보면 SK하이닉스는 2012년 SK그룹에 편입된 후 23년까지 대략 50조원을 벌었습니다. 여기서 설비투자와 21년 인텔의 낸드사업부 M&A에 들어간 70억달러를 빼면 잉여현금흐름은 3조원 수준에 불과합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S&P는 SK하이닉스가 올해 20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내지만 14조~15원의 설비투자로 잉여현금흐름은 4조~5조원에 그칠 것으로 분석합니다.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의 급작스러운 타계와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 속에서도 2017년 54조원, 2018년 59조원, 2021년 52조원, 2022년 43조원 등 천문학적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이게 화근이었습니다. 착시에 빠지고 나태해졌습니다. 그룹 수뇌부까지 코로나 특수에서 비롯된 호황을 자기 실력으로 착각했습니다. ‘시대의 영웅’이 떠나도, 후임 오너가 구속되고 재판을 받아도 회사는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는 착시에 빠졌습니다. 극히 일부지만 이런 상황을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는 HBM 시장에서 하이닉스에 밀리고,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TSMC와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그토록 단단했던 삼성맨들의 조직에 대한 로열티는 옛말이 됐습니다. 인재들은 하나둘 떠나고 드디어 사상 초유의 파업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경영학의 구루’ 짐 콜린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모든 위대한 기업의 몰락은 자만에서 시작됩니다. 안타깝지만 삼성이 그랬습니다.
SK도 예외가 아닙니다. 통신과 정유 등 전통 비즈니스에서 잘해야 연간 각 2조~3조원 이익을 내던 그룹이 SK하이닉스에서만 2017년 13조원, 2018년 20조원, 2021년 12조원 등 엄청난 영업이익을 냅니다. 하이닉스 덕분에 현대차그룹을 제치고 재계 서열 2위로 올라섭니다. 지금 SK그룹의 위기와 ‘리밸런싱’ 사태의 뿌리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룹 수뇌부조차 이름을 모를 정도로 계열사 숫자를 200개 넘게 늘리고,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를 꿈꾸며 SK스퀘어 같은 투자형 중간 지주사를 만들고, ‘파이낸셜 스토리’와 사회적 기업을 강조하고, 지주사 SK㈜ 주가를 20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선언하는 등의 일이 모두 이런 배경에서 진행됐습니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습니다.
버크셔해서웨이 같은 투자회사도, 파이낸셜 스토리도, 사회적 기업도 모두 소중한 가치지만 수뇌부의 자만심이 문제입니다. 직원들도 유연근무제, 자율 좌석제, 재택근무 등을 강조하면서 규율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SK그룹을 짓누르는 ‘오너 리스크’도 안타깝지만 사실은 이 연장선일지 모릅니다. 하이닉스가 갑자기 큰돈을 번 게 불행의 씨앗입니다. SK 계열사 CEO들이 이천에서 모여 다짐했듯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리밸런싱이든 구조조정이든 해야 합니다.
삼성전자는 하루빨리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해 하이닉스를 따라잡고,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TSMC와의 격차를 줄여 나가야 합니다. 메모리 반도체 1등 기업에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조직 문화를 혁신해 기술 인재들이 다시 모이는 로열티 강한 회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2년 만에 돌아온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반갑지만 삼성도 SK도 이번에는 착각하지 말아야 하고, 착시에 빠져도 안 되고,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통상 4~5년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지만 지금은 주기가 절반으로 짧아졌고 진폭도 심합니다. 여기에다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를 전략 자산으로 취급하는 등 지정학적, 정치적 변수까지 더해져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삼성 반도체와 SK하이닉스는 자신들이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역’ 24번째 괘인 ‘지뢰 복’(復) 다음의 괘는 ‘천뢰 무망’(无妄)입니다. ‘무망’은 망령됨과 허황됨이 없다는 뜻입니다. 복괘를 통해 회복되고 정상이 되면 당연히 허황된 게 사라집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번 반도체 대호황기에는 과거처럼 허황되고 망령된 경영상의 실수들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박종면 발행인 myun04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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