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수 전 KB금융지주 CFO
교보생명과 5년 넘게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사모펀드 ‘어피니티 컨소시엄’이 보유한 교보생명 지분 24%는 교보 광화문 사옥건설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준공된 광화문 사옥을 대우건설이 건축했다. 고 신용호 창업주는 본인의 교보생명 지분 일부를 공사대금으로 내놓으며 사옥을 마련했던 것이다. 고 김우중회장(11%)과 대우건설(24%)이 35% 지분을 가져갔었다. 대우건설에서 분할한 대우인터내션널((주)대우 파산 처리과정에서 포스코그룹에 양도)이 보유하던 지분을 미얀마 가스광구 투자자금 마련을 위해 시장에 내놓은 것이었다. 고 김유중 회장 지분은 한국자산관리공사를 거처 몇몇 사모펀드로 흩어졌고, 대우인터내션널 지분 24%가 문제의 어피니티 컨소시엄으로 넘어갔었다.
2012년 당시 가족 지분을 포함 40% 남짓한 지분으로 안정적인 경영권 유지가 어려울 수도 있는 상황으로 신창재 회장이 판단했던 것 같다. 그동안 ‘좋은 관계’를 맺어온 24%의 2대주주 변동은 오너입장에서 매우 신경 쓰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피니티 컨소시엄을 백기사(White Knight) 역할을 기대하고 재무적 투자자(FI, Financial Investor)로 낙점한 이유였다.
그런데, 철저한 수익률 게임을 하는 재무적 투자자는 단지 재무적 투자자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돈을 모아 투자하는 사모펀드 속성상 투자자금 회수기일이 되면 어김 없이 정해진 절차대로 자금을 회수할 수 밖에 없다. 사전에 구속력 있는 명확히 문서화된 약속이 없는 한 백기사가 흑기사로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다. 1980년부터 이어져온 고 김우중 회장과의 인연이 지난 2012년 9월 대우인터내션널의 지분 정리 때까지 지속되었다. (주)대우가 파산한 이후에도 10여년 이상 지속된 것이다. 처음 투자한 돈의 성격과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동안 무수한 난관을 극복하고 교보생명이 보험의 명가로 성장하는 20여년 동안 고 김우중 회장이 진정한 백기사 역할을 했던 셈이다.
지배구조와 경영권 안정은 기업의 지속가능성 확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2003년 신창재 회장이 가업을 승계 받으면서 상속재산(3002억, 주식 비중 97%) 61%에 달하는 1830억의 상속세를 주식으로 납부했다. 상속지분 45% 정도를 넘겨 받으면서 지분 6.26%를 내놓은 것이다. 당시 국세청 생긴 이래 가장 큰 상속세 액수였다고 한다. 상속세를 줄이고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방안 마련을 위해 대부분의 국내 재벌 오너들은 많은 에너지를 쏟고 법적리스크와 평판 훼손도 감수한다. 삼성의 이재용회장이 수년째 법정을 오가는 것도 다 이와 관련이 있다. 현대, 한화, 한진, 금호, 그리고 최근 LG와 한국타이어 가족간 분쟁도 모두 한결 같이 지배구조와 경영권 안정과 관련이 있다. 신창재 회장과 교보생명은 상속관련 ‘법적리스크’를 없애고 ‘좋은 기업’이라는 소중한 자산은 얻었지만 또다른 법적리스크와 경영권 상실 위험에 노출되는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교보생명은 1958년 8월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을 목표로 회사를 창업한 이래 ‘착하고 바른 기업경영’을 모토한 선대회장의 경영이념을 성실하게 따르고 실천을 해온 모범적인 기업으로 평가받아 왔다. 대한민국 대표상권인 광화문 네거리 랜드마크에 당장의 돈 되는 사업이 아니라 ‘책방’을 열기로 한 것은 보통의 저잣거리 장사꾼 머리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산소 없으면 못 살지만 산소를 위해 살지 않듯이 기업도 이익이 생존을 위한 연료이지만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라는 말 속에서 선대 창업주의 기업경영관을 엿볼 수 있다.
교보생명 신창재 회장에게도 사모펀드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그동안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는 지주회사 전환은 2005년 즈음에도 시도했지만 비금융자회사 관계 정리 등 선결과제에 대한 경영판단 보류 등으로 무산된 바 있다. 또한, 2014년 우리은행 지분인수를 통한 은행업 진출 시도, 2015년 인터넷은행설립 컨소시엄 참여 추진, 2016년 ING생명 인수 추진 등 대부분의 전략들을 중도 포기하거나 추진에 실패했다. 기업가치를 높여 IPO 성공을 이끌기 위한 다양한 성장전략들이 대부분 무산된 것이다. 2018년 이사회결의로 IPO 추진이 본격화되던 시점은 국내 생명보험시장이 저금리와 IFRS17 회계제도 전환 등 불확실성이 매우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신창재 회장이 결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교보생명 뿐만 아니라 신회장 개인의 경영판단과 추진력, 진정성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상당히 훼손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경영권 확보 고민이 길어지면서 IPO 실패와 사모펀드 족쇄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시장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현재 시장상황을 감안하면 어피니티 컨소시엄이 제시한 풋옵션 가격 40만 9912원은 현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 신창재 회장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인 것이다. 2023년 12월 16일 현재 상장 생보사들 시장가치는 장부가를 훨씬 밑돌고 있다. 삼성생명 PBR이 0.57배, 한화생명 0.30배, 동양생명 0.36배, 미래에셋생명 0.47배 수준이다. 이들 상장사 PBR 평균 0.43배를 적용하면 교보생명의 시가총액은 약 4조 9282억원(2023년 9월말 순자산기준) 수준이다. 주당 장부가 56만5647원, 시가 24만400원 수준이다. 어피니티 컨소시엄의 요구수준을 맞추려면 PBR 0.72배 이상으로 시장에서 평가받아야 가능하다. 현재 시장가격은 어피니티 컨소시엄이 주당 24만 5천원에 투자했던 수준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사모펀드 입장에서는 당초 투자자들과 약속한 기대수익에 훨씬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회비용을 감안하면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사모펀드들이 교보생명 주식을 인수한 이후 국내 생명보험 시장추세를 감안하면 적당한 가격으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기회는 몇 차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0%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분으로 경영권 방어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교보생명 경영진과 신회장의 소극적인 대응이 지금의 소송 국면을 만든 측면이 크다. 양측 합의된 기업가치가 최초 투자한 주당 24만 5천원을 하회하든 어피니티 컨소시엄 요구를 수용하든 신회장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IPO 추진을 통해 공정한 시장가치를 확인하자는 주장이 부담 여력이 충분치 않은 신회장 측에서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안정한 지배구조와 혼란스런 경영시스템이 몇 년째 지속되는 동안 회사 가치가 훼손되지 않고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IPO가 미뤄질수록 신회장 개인이 물어줘야 할 부담도 점점 커질 수 있다. 과거 삼성생명에 이어 국내 생명보험사 부동의 2위를 고수하던 교보생명이 최근 신한금융라이프 등 2~3위권 생보사들에도 급하게 쫓기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아주 힘든 경영여건에서 제판분리 등 전략적 판단으로 강하게 밀어 부치고 있는 한화생명의 추진력이 대비되는 모습으로 시장에서 회자되기도 한다. 경영판단 실기와 실패가 상당한 시간을 두고 현실화되는 보험업의 특성상 당장 교보생명이 재무적 어려움에 봉착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누적된 경영누수가 이슈화되어 문제로 인식되는 순간 거대한 항공모함의 방향이 한순간에 되돌려지지 않듯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 위험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국제상사중재원(ICC)과 국내 재판과정이 얼마나 지속되고 어느 쪽이 최종 승자가 될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 이기든 장기화될수록 교보생명은 결과적으로 패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어려운 생명보험업 환경에서 회사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도 생존에 위협을 느낄 상황이다. 패자가 된 회사의 기업가치 훼손은 주주인 신회장과 사모펀드 모두의 자산가치 훼손으로 귀결될 것이다.
주주들간 싸움으로 일어나는 기업가치 상실은 주주 자신들의 가치 훼손에만 그치지 않는다. 교보생명을 믿고 거래하는 보험가입자들과 금융 및 과세당국 등 다른 이해관계자의 가치도 동시에 손상시키게 된다. 한 기업의 문제가 단순히 주주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아직까지 교보생명은 매년 5000억~6000억원 이익을 꾸준히 내고 있다. 5조~6조원 투자로 10% 이상 수익률이 기대되는 좋은 회사이다. 시장에서 큰 돈을 들고 기다리는 투자자들이 있는 한 지금도 모두에게 기회의 문은 열려 있다고 본다. 다만, 각자의 처지에서 그 기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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