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회장제 폐지로 금융지주 지배구조 더 불안해져
KT·포스코서 벌어진 혼란 금융그룹서 재연될 듯
‘F4(Finance4)회의’라는 게 있습니다.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의 수장들이 모여 경제 현안을 논의하고 대책을 세우는 자리입니다. 당연 최상목 부총리가 좌장이지만 시장 영향력 측면에서는 이복현 금감원장이 최고입니다. ‘복원장’으로 통하는 그의 발언이 시장에 미치는 파급력은 태영건설 워크아웃 과정에서 충분히 입증됐습니다. 개각때 교체설이 돌던 조용한 스타일의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유임된 것도 ‘복원장’과 호흡이 잘 맞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금융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복현 원장은 지난달 금융지주 부회장 제도에 대해 “기존 회장의 셀프 연임보다는 진일보한 제도지만 폐쇄적으로 운영돼 외부 경쟁자 물색을 차단하고, 다른 후보를 현직 회장 등 유리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들러리로 세우는 형태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금감원은 지난달 ‘지배구조에 관한 모범 관행’을 발표했습니다. 금감원은 금융지주가 부회장제를 운영하려면 차기 회장 도전 가능성이 있는 외부 후보에게 비상근 직위를 부여하고, 역량개발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등 인사권을 가진 이사회와 충분히 접촉할 기회를 주도록 했습니다.
4대 금융그룹 회장 중 외부 출신은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이 유일합니다. 예를 들어 부회장제를 운영중인 금융지주사에서 실제로 임종룡 회장같은 검증되고 능력 있는 외부 후보를 영입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임종룡 회장은 우리금융 회장으로 오기 전에 대형 법무법인 고문으로 일했습니다. 금융위원장과 NH금융지주 회장을 역임한 임 회장 정도면 법무법인에서의 대우가 금융지주 회장 못지않습니다. 이런 인물이 많아야 연봉 1억~2억원의 금융지주 비상근 고문으로 올 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차기 회장 자리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내부 부회장들과 경쟁까지 해야 하는 데 갈 곳 없는 올드 보이가 아니면 누가 오겠습니까. 금융지주 입장에서는 금감원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하면서 부회장제를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KB금융과 하나금융이 부회장제를 폐지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부회장제 폐지 이후 앞으로 금융그룹 지배구조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현직 회장들의 권한이 더 강화되고, 마음만 먹으면 셀프 연임이 더 쉬워지고, 내부 후계자 발탁과 육성이 더 차단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금융지주의 지배구조가 더 불안하게 됩니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부회장제를 폐지한 KB금융은 양종희 회장이 첫 임기를 시작해 차기 회장 후보군을 말하기는 이르지만 이번에 유임된 이재근 국민은행장과 김성현 KB증권 대표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재근 행장이나 김성현 대표가 1년 뒤 물러난다면 갈 곳은 고문 자리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전임 윤종규 회장 체제에서 실권을 갖고 상호 경쟁했던 양종희 허인 이동철의 3인 부회장 체제와는 위상이 전혀 다릅니다. 양종희 현 회장이 연임한다면 모르지만 단임에 그친다면 KB금융은 후계 구도 혼란으로 ‘잃어버린 10년’ 시절처럼 위기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금융도 이번에 부회장제를 폐지하고 ‘부문임원’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기존 3인의 부회장 중 박성호 부회장은 물러났고 강성묵 이은형 부회장은 부문장으로 개편됐습니다. 하나금융은 함영주 회장이 22년 3월 취임해 금년 말에는 유임하든 퇴임하든 회장 선임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금융 차기 회장 후보로는 글로벌 전문가 이은형 부문장 및 그룹손님가치부문장과 하나증권 CEO를 맡고 있는 강성묵 대표와 이승열 하나은행장으로 압축됩니다. 세 사람 모두 회장 후보로 손색이 없다지만 실권을 갖는 부회장에 비해서는 위상이 떨어집니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외부 인사가 도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한금융은 최근 부회장제를 운영하지 않았고 은행 증권 보험 자산운용 등 대형 계열사 사장 중에서 지주 회장을 선임해왔기 때문에 당장 문제될 건 없습니다. 진옥동 회장이 취임한 지 1년도 안돼 후계자가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진 회장이 정상혁 신한은행장에 힘을 실어준다지만 속단하기엔 이릅니다. 다만 신한금융 역시 향후 진 회장이 연임하고 신한은행장 등 주요 계열사 CEO들이 그전에 물러날 경우 부회장제 폐지로 후계수업을 할 자리가 딱히 없는 점은 걱정입니다. 차기 회장으로서 경쟁력을 갖췄다 해도 진옥동 회장과 퇴임 시기가 다르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금융은 임종룡 회장 직속으로 이번에 기존 기업문화혁신TF를 격상시켜 그룹 CEO 후보군을 육성하는 ‘기업문화리더십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금감원의 ‘지배구조 모범 관행’에 부응하고 조직문화를 혁신하기 위한 것이지만 후계자 양성은 조직을 만들어 되는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현직 회장이 차기 후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실권을 줘야 합니다. 우리금융의 경우 임종룡 회장이 워낙 거물급인 데다 취임한 지 1년도 안됐고, 조병규 우리은행장의 존재감이 너무 미미해 차기를 거론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금융은 우리은행을 제외하면 나머지 계열사들의 비중이 너무 약해 내부 후계자 양성도 어렵다는 점이 큰 문제입니다. 그 결과 은행장 출신 중에 마땅한 인물이 없으면 외부 명망가들에 눈을 돌리게 되고,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일수록 ‘위대한 회사’로의 도약과는 멀어지게 되는 근원적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임종룡 회장의 최우선 과제는 증권 보험 등 대형사 인수합병이 아니라 경쟁력을 갖춘 후계자 양성이어야 합니다.
현직 CEO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지속가능 기업’이 되도록 유능한 후계자를 육성하는 일입니다. ‘지배구조 모범 관행’ 도입과 부회장제 폐지로 금융그룹의 지배구조는 더 불안하게 되고 후계자 양성은 더 어렵게 됐습니다. 금융지주 입장에서 보면 최근 그룹 회장 선임과 관련해 KT와 포스코에서 벌어진 일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 1~2년 뒤 그들에게 닥칠 일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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