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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이숙희와 아워홈
개인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법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녀 이숙희의 인생사는 해방 이후 산업화를 일군 대한민국 재계의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그는 경영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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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법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녀 이숙희의 인생사는 해방 이후 산업화를 일군 대한민국 재계의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그는 경영에 참여한 언니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아버지 '절친'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3남 구자학과 정략 결혼했다. 남편은 삼성그룹의 뿌리인 제일제당 이사를 거쳐 신라호텔 사장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총명한 둘째 사위의 경영 능력을 신뢰했다. 데릴사위 같았던 남편이 친정의 가전 사업 진출로 인해 LG그룹으로 돌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이지만 이는 한국 재계사(史)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던’ 초기 산업화 시대가 끝나고 자본주의 무한 경쟁이 서막을 올린 상징적인 사건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친정에선 ‘출가외인’ 취급을, 시댁에선 괘씸한 사돈 집안의 핏줄로 낙인찍혀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본가 경영에 합류해 전 계열사의 성장에 기여한 남편은 그룹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급식업체 ‘아워홈’을 창업해 연매출 1조 7000억원 알짜배기 회사로 키웠다. 1남 3녀를 낳은 이들의 막내딸 구지은 전 아워홈 부회장이 일찍 경영 수업을 받은 것도 젊은 시절, 딸들도 경영에 참여하는 분위기의 삼성가에서 경영 노하우를 쌓은 남편의 영향이 컸다.
그를 지난해 12월 초 서울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마주쳤다. 순간 국내 재계의 응축된 역사가 느껴졌다면 과장일까.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탄 그를 장녀인 구미현 아워홈 회장이 극진히 살피며 어머니의 식사를 챙기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2022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회사를 맡아 온 막내딸의 경영권을 장녀와 장남 구본성 전 부회장이 힘을 합쳐 빼앗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3남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아워홈을 인수하겠다고 밝히자 재계는 또다시 들썩였다. 이날 모녀가 함께 한 점심 식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사업 때문에 친정과 시댁이 적으로 돌아서 유산 한 푼 받지 못했고, 그룹사의 일감 몰아주기로 독립한 남편의 성공을 지켜봤으며 회사를 이어받아 키우겠다는 막내딸과 매각하겠다는 장녀·장남 간의 반목을 모두 겪었다 .
그는 어떤 심정일까. 회사 매각 시 주식 우선매수권을 가진 구지은 전 부회장이 대외적으로 침묵을 지키면서 아워홈이 한화의 품에 안길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이숙희 개인에게는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 또한 재계라는 숲의 관점으로 보면 '오너 3·4세 시대로 넘어가면서 기업이 재편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 80여 년, 윗세대의 업적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 성장이 멈춘 한국의 기업들을 승계받은, 혹은 승계 받을 예정인 이들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까. 무슨 돌파구를 찾을까. 이미 관료화된 거대한 조직은 또 어떻게 변화시킬까. 기대보다 우려가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심현희 유통산업부장 macduck@blo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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