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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O 리포트] 잃어버린 삼성의 길 찾기

Numbers_ 2025. 3. 1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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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O 리포트] 잃어버린 삼성의 길 찾기

선대회장은 ‘문제해결형’이 아닌 ‘문제정의형’ 조언단기대응보다 투자와 지배구조 등 큰 그림 그려야등기이사 복귀해 실질적 책임경영 성과 보여 줘야삼성이 위기에 빠지면 한국경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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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회장은 ‘문제해결형’이 아닌 ‘문제정의형’ 조언
단기대응보다 투자와 지배구조 등 큰 그림 그려야
등기이사 복귀해 실질적 책임경영 성과 보여 줘야

삼성이 위기에 빠지면 한국경제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의 20%에 육박하던 삼성전자 시총이 15%대로 추락하자 코스피 지수가 맥을 못 추고 삼성전자 지분을 보유한 수많은 개인투자자 역시 많이 힘들어 한다. 삼성전자의 위기 원인이 약화된 반도체 기술력에 있다고 많은 전문가가 진단한다. 파운드리분야 기술력이 TSMC보다 열세이고 차세대 반도체로 떠오른 HBM기술은 SK하이닉스에 뒤진다. 그동안 절대강자로 군림해온 메모리반도체 분야도 경쟁자의 추격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반도체 제조기술의 상대적인 경쟁력 약화가 보통 사람의 눈에도 삼성전자 위기의 현상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기술경쟁력 약화는 결과일 뿐이다. 삼성 위기의 진원지는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모범’으로 칭송이 자자할 때 국내 금융사들이 그들의 비전(Vision)을 ‘금융의 삼성전자’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 ‘왜 금융에서는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기업이 나오지 않느냐’는 고 이건희 회장의 질문은 금융계에 던지는 질책이자 자성을 담은 화두였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국내 금융계는 크게 바뀐 게 없다. 게다가 삼성은 ‘비전’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반전돼 안타까울 뿐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1996년 8월 징역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10월 사면복권이 됐다. 곧이어 닥친 외환위기로 국가적 위기상황이 한창 진행중이던 1997년 12월 이건희 회장은 한권의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를 출간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5주년을 앞둔 시점에 회장취임 1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의 하나였다.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과 인생관이 묻어나는 잘 정리된 산문집이다. 에세이 속의 이건희 회장에게 이재용 회장이 ‘삼성을 살리는 길’을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아마 제일 먼저 ‘삼성 위기론’을 선포하라고 권했을 것 같다. 더 이상 삼성은 1등이 아니다. 살아남으려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하며 그룹 전체의 대대적인 혁신과 강력한 개혁을 과감히 추진하라고 했을 것이다. 내부 임직원에게서 ‘위기’라는 말이 사라진 지금이 삼성의 가장 큰 진짜 위기다.

삼성의 위기상황을 감지할 수 있는 시그널은 비단 재무실적의 퇴행에 국한되지 않는다. 재무적 숫자는 후행적인 결과일 뿐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누출되는 경영관리 행태와 전해지는 임직원의 태도에서 먼저 드러난다. ‘초격차’ 슬로건을 내건 ‘기술의 삼성’이 위협받는 상황을 더 이상 덮어둘 수 없어 지난해 10월 삼성 스스로 위기상황을 공론화했다. 하지만 아직 기대할 만한 변화와 감동을 전하는 소식은 없다. 살아남기 위한 과감한 기술투자와 인수합병도 없다. 신속한 의사결정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복잡한 지배구조를 바꾸려는 조짐도 없다. 선대회장의 유훈인 ‘초일류 기업’을 구현할 큰 그림은 보이지 않고 상속세 등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에 급급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10조원의 자사주 매입효과는 비상계엄 여파로 눈에 띄지도 않는다. 우선 3개월 동안 자사주 3조원을 매입해 소각한다는 약속을 실행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올 해 2월 19일부터 두번째 추가매수가 진행중지만 역시 투자자 호응은 기대 이하다. 오히려 12조원이 넘는 오너일가의 잔여 상속세 준비 프로젝트 정도로 폄하되고 있다. 상속세 때문에 삼성가의 세 모녀가 내다 판 계열사 지분이 3조3000억원에 이르고 2조9000억원의 주식담보대출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매각할 수 있은 계열사 지분은 얼마 없는데 주가하락으로 담보인정비율(LTV)이 부족해지는 상황이다. 내년까지 납부해야 할 상속세가 아직 2회에 걸쳐 4조원 이상 남아 있다. 삼성전자 주가가 더 이상 떨어지면 곤란하다.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 오너 지분이 많은 계열사의 배당과 주가를 올려야 오너 일가 금융비용 완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다.

외부 투자자가 삼성전자 주식을 장기 보유하는 것은 배당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반도체 기술기업으로서 업을 선도하며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해온 것을 더 높게 평가한다. 삼성전자처럼 고도의 자본 집약적인 기업이 자사주매입 배당성향 자본이익률 등 단기적 재무숫자에 매몰되면 장기성장 동력을 잃을 수 있다. 오히려 본업 경쟁력을 높이는 의미 있는 규모의 M&A나 AI 기술투자 우수 인적자원 확보에 가진 돈과 역량을 더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에세이에서 초일류 기업이 되려면 ‘문제 해결형’이 아닌 ‘문제 정의형’이 되라고 조언한다. 선대 회장이 이재용 회장에게 당부하는 유언처럼 들린다. 1997년 세계청소년축구 한국과 브라질 경기를 보며 느낀 생각을 정리한 ‘1등의 여유’ 가운데 한 대목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진 ‘시험문제 출제자’ 마인드가 초일류 기업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데 길들여진 ‘수험생 마인드’는 평생 2등일 수밖에 없다. 뒤처지는 2등 기업은 문제가 눈앞에 닥쳐야 허겁지겁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게으른 나그네가 석양길이 바쁘듯이 2등은 항상 바쁘지만 1등은 여유롭다.

2018년 11월 삼성전자 ‘글로벌전략회의’에서 공유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스파이용 방해공작 지침’이 세간에 회자된 적이 있다. 2017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이재용 회장이 기소돼 2018년 2월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 실형을 받은 직후라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미국 최고정보기관의 극비전략으로는 너무 시시했다. 적대국 주요 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침투한 스파이의 ‘공작수행지침’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지연시키고 조직내에 불평과 분란을 유발해 확산시키는 전략이다. 조직내에 암약하는 스파이의 의도된 ‘바보행세’가 자기 주위의 무능한 직장인과 너무 닮아서 회의 참석자들이 크게 공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삼성그룹 내부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진 바 없다. 삼성전자 임직원 가운데 20대 비중이 2018년 48.6%에서 2023년 27.1%로 5년만에 21.5%포인트 감소했다고 한다. 젊다고 경쟁력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조직이 늙어가는 속도가 한국사회 고령화속도를 훨씬 능가한다. 첨단 기술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R&D기술과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재원의 크기에 비례한다.

이사회와 임직원을 설득해 기업의 자원배분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최고경영자에게 있다. 이재용 회장은 올 해 주주총회에서도 등기이사 명단에서 빠졌다. 이미 노출된 사법리스크가 더 이상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다. 삼성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주인 없는 회사로 계속 운영할 생각인 것 같다. 메리츠금융 조정호 회장처럼 비즈니스 전문가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맡길 수 없다면 오너가 직접 챙기고 나서야 한다. 오너경영으로 사업에 성공하려면 스스로 비즈니스를 처음부터 정확히 이해하고 끝까지 꼼꼼히 챙겨야 한다. 성공한 반도체뿐 아니라 실패한 자동차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식견과 넘치는 열정을 30년전 ‘에세이’가 고스란히 전해준다. 기업의 재무제표 숫자는 그냥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최고경영자와 임직원의 고뇌와 피땀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결과가 단지 숫자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재용 회장이 30년전 선친이 쓴 에세이집을 다시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허정수 전문위원 jshuh.jh@bloter.net